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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3898년 유소환웅씨(有巢桓雄氏:火德王)로부터 시작된다.
  1차 7세, 2차 4세, 3차, 4차, 5차, 6차, 7차, 8차, 9차, 10차, 11차 각 1세, 12차 5세, 13차 1세로서, BC 2430년까지 1,530년간 존속했다.

  이때에 황제와 치우의 10년 대 전쟁이 있게 된다.
  삼국유사의 곰과 호랑이의 신화적 근원은 다음과 같다.
  고대 사서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유웅씨(有熊氏) 부족인 곰족(熊族)과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부족인 호족(虎族)이 살았으며, 이들이 선(禪)을 통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동굴 등에서 수련을 행하던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호랑이를 신농씨 부족이라고 보았고, 곰을 황제 부족이라고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중국 최고의 사학자 하광악(何光岳)의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광악(何光岳)이 지은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 제64장에는, 치우와 황제의 전쟁을 일컬어『강형제부락지간적규분(姜兄弟部落之間的糾紛)』이라고 적고 있다. 강씨 형제의 부락간의 분쟁이라고 했다.

  요즘 재야사학계에서는 치우(蚩尤)만 우리 단군으로 치고 황제(黃帝)는 중국인으로 치는데, 환단고기의 잘못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치우와 황제는 사촌지간이기 때문이다.
 신농씨(神農씨)의 후손이 계곤씨(啓昆氏)이고, 계곤씨의 아들이 치우(蚩尤. B.C.2707년)이며, 황제(黃帝)의 아버지는 소전씨(少典氏. B.C.2789년)이다. 치우의 아버지 계곤씨와 황제의 아버지 소전씨는 형제지간이다.

  치우와 황제간의 10년 대 전쟁은 본래 문중 싸움에서 시작되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대권관계였다.
  황제(黃帝)는 12세에 천자(天子)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치우(蚩尤)는 42세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치우는 하북성(河北省)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막강한 병사와 병기를 만들어 황제(黃帝)에게 도전했다. 황제(黃帝)는 황하(黃河) 이남이었다.
  황제의 나이 20살 때부터 시작된 치우와의 10여 년간 73번의 대접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났던 것으로 사기(史記)에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38권 한기(漢紀) 30권 왕망(王莽) 하편에 보면, 황제(黃帝) 휘하의 대장군(大將軍)과 사관관리(士官官吏)는 738,900명(七十三萬八千九百名)이며, 군졸(軍卒)들은 무려 1,350만 명(千三百五十萬名)이 황제의 명을 받은 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치우(蚩尤)의 군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1천만 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대사회의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치우와 황제가 싸운 곳은 탁록(涿鹿) 지방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는 판천지야(阪泉之野)라고 했다. 판천의 들은 탁록(涿鹿)의 비탈진 언덕을 말한다.
  탁록(涿鹿)은 탁록산이 있는 곳으로, 직예성(直隸省), 즉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의 동남으로 되어있다. 혹 선화현(宣化縣) 동남에 있는 계명산(鷄鳴山)이 있는 곳이라고도 했는데, 옛날에는 탁록산(涿鹿山)이라고 되어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북경시(北京市)에서 서북(西北)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서, 처음에는 황제의 군사가 패했지만 결과는 황제가 승리했다. 치우가 피살된 뒤 그 잔여세력들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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