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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흑치상지) 신원  
노성매

 

「동아시아 불세출의 명장, 흑치상지」

       -나라를 지켜 주군의 위엄을 드러내다

 

  

흑치상지가 죽은 해에 아들 흑치준은 13살이었다.

그의 묘지명도 ‘흑치부군묘지명’으로 기록되어있는 걸로 보아,

아비가 죽고 그가 흑치부의 군장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13살 어린 나이였다.

아비는 모반죄로 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흑치상지 혼자의 죽음으로 끝났다.

당시 무측천이 그의 무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선에서 덮어버렸음을 의미한다.

 

흑치상지가 죽은 것은 689년 10월.

무측천은 690년 9월 9일 제위에 올랐다.

주홍 등의 권한 남용으로 그들 손에 흑치상지가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무측천으로서는 내버려둘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황제로 등극한 후 691년 주홍과 삭원래가 제거되었다.

가장 악랄했던 내준신은 696년 저자에 기시되었다.

그는 중종과 예종을 무고했고, 무측천이 가장 사랑했던 딸 태평공주까지 건드렸다.

 

흑치상지묘지명에 의하면 아들 흑치준의 노력으로 698년 신원되었다.

그리고 ‘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 상주국 연국공’이라는 옛 직위를 회복시키고,

다시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했다.

다음해인 699년 1월 22일 흑치상지의 개장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렸고,

개장에 소요되는 물품 일체와 인력까지 모두 관청에서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2월 17일에 망산(邙山) 남쪽에 그의 묘를 이장했다.

그리고 1929년에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어 그의 묘지석만 우리에게 남겨졌다.

 

무측천이 내린 제서(制書)의 횡간에는

흑치상지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하다.

이것으로나마 진정 그의 영혼이 위로가 되길 바라는 심정이 간절하다.

 

뜬소문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원통함을 품고 숨을 거두었다.

죄가 분명하지 않음이 의심스러웠다.

이에 조사를 더해 보았으나 모반의 정황이 없었다.

그 진실한 마음이 전해지지 못하여 애통할 따름이다.

 

흑치상지의 죽음을 진실로 애통해했을 무측천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690년 7월의 자치통감 기록을 보면,

무측천이 비록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나, 공이 있고 정직함을 알면 매우 공경했고 어렵게 여겼다고 한다.

 

흑치준이 아비를 신원한 것은 24때였다.

흑치준묘지명을 보면, 그는 약관인 스무 살에 양왕을 따라 서도로 종군했다.

양왕은 무측천의 조카로 당시의 제2인자 무삼사를 말한다.

오랫동안 무측천은 무삼사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무삼사 역시 자신이 후계자일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만년에 적인걸의 설득으로 중종이 다시 무측천의 뒤를 이었다.

 

무삼사를 따라 종군한 이후로 흑치준의 진급은 유달리 빠른 편이다.

25세에 유격장군 행난주광무진장 상주국이 되었다.

그때 이미 상주국의 훈작을 받고 있었다.

그의 무위가 뛰어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뒤를 봐주고 배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무삼사가 어린 흑치준을 돌봐주었고,

흑치상지의 신원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4살의 어린 나이로,

손자조차 벌건 대낮에 궁궐 뜰에서 때려죽이는 무측천에게 어찌 다가갈 수 있었겠는가.

아비를 신원해달라는 것은,

무측천의 과오를 인정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흑치상지묘지명의 찬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흑치상지와 군영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이며,

당나라 사람이다.

 

공은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惟公之自東兮

 

내가 군에서 참의소에 있을 때,

그의 도량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이에 명문을 짓는다.

余嘗在軍得參義所 感其道頌其功 乃爲銘曰

흑치상지묘지명

 

명문을 보면 오랫동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자의 진정어린 공경이 담겨있다.

 

누사덕일 것으로 여겨진다.

당나라 사람으로 흑치상지와 함께 군 생활을 했고,

무측천의 제서가 새겨진, 대장군 흑치상지의 비문에 감히 명문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당대에 누사덕 밖에 없다.

 

그는 흑치상지와 동년 생으로 678년 이경현의 부장으로 토번에 왔다.

그리고 흑치상지가 하원을 떠날 때까지 그의 부장으로 4, 5년을 함께 했다.

이후 흑치상지의 후임으로 하원군 경략부사가 되었다.

중앙으로 돌아와서는 적인걸을 추천했으며,

흑치상지가 신원되던 698년경에는 무측천의 장상이었다.

그는 700년 9월 71세로 졸하였다.

 

 

석양의 땅에 태어나,

지는 해를 좇았던 위대한 무장의 슬픈 노래.

그의 생애는 지는 해를 잡기 위해 서쪽으로 말을 달렸던 과보의 운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시린 추위에도 뜻을 바꾸지 않고 묵묵히 주군의 곁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그 어둠을 함께 했다.

부여융은 뛰어난 주군은 아니었으나, 그가 힘을 다해야할 백제의 왕이었다.

한 나라를 세울만한 무위와 인품을 지녔으되,

오직 충과 의를 다한 신하로 살았다.

 

선왕께서 하교하신 바가 아니면, 기필코 도모하지 않았다.

非先王之所貽訓 必不出於企想

흑치상지묘지명

 

그는 당(唐)에 선왕(先王)의 빚을 갚았고, 마침내 주군의 곁으로 돌아갔다.

조선은 그를 기려 백제의 배향신하로 올렸다.

 

 

 

 

( 2019년 04월 05일 11시 40분   조회: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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