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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흑치상지) 돌궐의 대칸(大汗), 골돌록 격퇴  
노성매

 

「동아시아 불세출의 명장, 흑치상지」

       -나라를 지켜 주군의 위엄을 드러내다

 


684년 낙빈왕(駱賓王)의

대이경업전격천하문(代李敬業傳檄天下文)」이 당(唐)을 뒤흔들었다.

 

이경업을 대신해 천하에 알린다는, 무측천을 토죄하는 격문이었다.

그해 9월 양주(揚州)에서 이경업이 난을 일으켰다.

무리가 10만이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중종이 무측천과 대립하자,

무측천은 3개월 만에 폐위시켜 방주(房州)로 축출하고 예종을 세웠다.

이경업은 이적의 손자다.

이적의 본명은 서세적.

이씨 성을 하사받고 태종 이세민을 피휘하여 이적이 되었다.

무측천은 이경업을 서경업으로 다시 되돌린다.

 

10월 무측천은 이효일(李孝逸)을 양주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0만 대군으로 토벌을 명했다.

왕족이었던 이효일은 임회(臨淮)에 도착해 군영을 꾸렸다.

그러나 전장에서 공격에 미적거려 전투도 하기 전에 군사들의 예기를 꺾었다.

싸우기도 전에 지쳐 패했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토벌군의 패배가 잇따랐다.

 

11월 무측천은 흑치상지를 강남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경업의 토벌을 명했다.

 

이때 경업의 본영은 강소성 고우(高郵) 하아계(下阿溪)에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유가 회음(淮陰)에,

경업의 선봉장 위초와 위지소는 도량산성(都梁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효일은 도량산성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도량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공격은 실패하고 엄청난 사상자만 발생하자,

이효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일 작전회의만 되풀이했다.

전황은 교착상태였다.

 

흑치상지는 곧바로 고우로 달려갔다.

경업의 본영은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넓은 구릉지에 세워져있었다.

 

때는 11월.

구릉지의 갈대와 풀이 바싹 말라있었다.

흑치상지는 화공(火攻) 전법으로 그들의 본영을 들이쳐 단 한번으로 승부를 갈랐다.

대패한 경업은 남쪽 강도(江都)로 달아났다.

대세가 기울자 경업의 부장 왕나상(王那相)이

경업 형제와 낙빈왕의 머리를 베어들고 관군에 항복했다.

 

경업의 난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파장은 돌궐 방어선 와해로 이어졌다.

 

선우도안무대사 정무정이 연좌되어 군중에서 참수되었다.

배염의 무고였다.

돌궐은 이 소식을 듣고 잔치를 벌이고 기뻐했다.

돌궐군은 그의 사당을 세워놓고 출전할 때마다 기도를 드렸다고 하니,

그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오르도스[河套] 지방의 하주도독 왕방익(王方翼)도 연좌되어 유배에서 죽음으로 이어졌다.

 

북방의 두 맹장(猛將)이 경업의 난에 연좌되어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돌궐 방어선이 모두 허물어졌다.

 

630년 이적에 의해 동돌궐이 와해되고,

657년 소정방이 서돌궐을 멸망시켰다고,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고비사막의 바람을 무슨 수로 잡는다는 말인가.

한번 휘젓고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다.

 

682년 돌궐의 아사나골 골돌록(阿史那骨篤祿可汗)이 흩어져있던 돌궐을 병합했다.

그에게는 명재상 아사덕 원진(阿史德元珍)이 붙어있었다.

원진은 소정방에 의해 포로로 당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전적이 있었다.

 

683년 초부터 산서, 하북, 섬서 북부의 황하유역으로 돌궐의 침입이 잇달았다.

정주자사, 선우도호부사마 장행사가 전사했다.

울주자사 이사검도 죽었다.

684년에는 삭주(朔州)까지 골돌록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무측천이 선우도안무대사 정무정을 죽임으로써,.

머리에 이고 있던 화로에 부채질을 한 셈이다.

 

돌궐군의 침략이 일상화되었다.

686년 무측천은 순우처평을 보냈다.

그러나 삭주 인근 흔주에서 대패하고 5천여 명이 죽었다.

 

당과 돌궐 사이의 전투는 682~687년에 모두 46차례나 기록된다.

1년에 평균 8차례 침입이었다.

 

686년 무측천은 흑치상지를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에 제수했다.

그는 하동도[지금의 산서]와 산서북부로 침입하는 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을 떠났다.

도성에는 고밀제 시행으로 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첫 전투는 삭주의 동쪽 양정(兩井)에서 벌어졌다.

2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찰중에 예고없이 돌궐 3천 기와 마주쳤다.

놀라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돌궐군은 전투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 갑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5대 1이었다.

이러한 때 지휘관의 판단능력이 빛을 발한다.

흑치상지는 그대로 돌궐 군을 덮쳐 흩어버렸다.

흑치상지의 돌궐과의 첫 격돌이었다.

 

도망친 잔적들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흑치상지는 움직이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고 그 자리에 진영을 꾸렸다.

군사들에게 나무를 베어 불을 피우도록 했다.

생나무는 연기가 많이 난다.

진영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봉화를 피운다는 의심이 들게 했다.

마침 큰바람이 불어 먼 곳에 흙먼지가 일었는데

돌궐군은 그것을 구원병의 호응으로 여겼다.

돌궐군은 흑치상지의 위장전술에 속아 황망히 퇴각했다.

 

687년 2월 골돌록이 북경 북쪽의 창평현에 침입했다.

자치통감에는 ‘우응양대장군 흑치상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치상지묘지명에 무측천이 내렸다는

 ‘우무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는 언제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흑치상지를 연국공(燕國公)에 봉하고 식읍(食邑) 3천 호를 내린 것이

신당서에는 토번의 근거지 양비천을 뿌리뽑고 난 뒤의 681년이라고 되어있고,

구당서와 책부원구에는 양정에서 돌궐을 물리친 후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흑치상지묘지명에는 무측천이 제서를 내려,

그를 연국공에 봉하고 우무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를 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이 셋 중에서 묘지명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때까지도 집안에 무측천의 제서를 보관하고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묘지명을 작성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연국공으로 봉해지고 우무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가 된 것은

687년 2월 전후가 된다.

 

686년 흑치상지가 처음 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간 곳이 연연도(燕然道) 삭주인데,

신무도(神武道) 창평 전투는 687년 2월이다.

골돌록이 창평을 침입해 온갖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으나,

그곳 방어책임자는 속수무책이었다.

관리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무측천은 삭주에 있던 흑치상지에게 창평에 침입한 골돌록을 막도록 명했다.

골돌록이 그의 참모 원진(元辰)까지 데리고 창평을 공략했다면,

절대 소규모 전투가 아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어떠한 사료도 남아있지 않다.

 

이 승전으로 무측천은 그를 연국공에 봉하고 식읍 3천 호를 내린 듯하다.

무측천의 숨통을 조이던 골돌록을 흑치상지가 처음 패퇴시켰으니,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2월의 신무도 창평전투 후에,

그해 8월 연연도 삭주에서 벌어진 황하퇴 전투와의 간극은 불과 반년이다.

모두 골돌록의 친정이다.

 

이 해에 골돌록이 ‘일테리쉬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는 기록을 보건대,

칸으로서의 첫 행보를 중원공략에 둔 것 같다.

돌궐과 당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7월 골돌록은 20만 대군을 몰고 삭주를 향해 출발했다.

북경의 서남쪽.

낙양 1천리 밖이었다.

 

무측천은 흑치상지를 연연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좌응양위대장군 이다조와 왕구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했다.

 

동 8월 흑치상지가 이끄는 10만 대군과 돌궐의 20만 대군이

삭주 인근 황하퇴(黃花堆)에서 격돌했다.

적아(敵我) 30만의 대회전(大會戰)이었다.

 

기병전에 능한 돌궐군과 보병이 주력인 당군(唐軍)이 평지에서 맞붙으면

당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흑치상지는 삭주에서 서북 50여 킬로 떨어진 황하퇴(黃花堆)를 전장으로 결정했다.

 

돌궐군이 삭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될 곳으로,

왼쪽으로 응모산(鷹毛山), 오른쪽으로 후소산(后所山)을 낀 평지로.

음산 산맥으로 가로막힌,

고비사막과 태원(太原)을 잇는 주요 길목이었다.

 

응모산과 북쪽 양랑산(兩狼山) 사이에는 거대한 반구 모양으로 땅이 움푹 파인 마영향(馬營鄕)이 있었다.

병사들을 숨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흑치상지는 적이 간파하지 못하도록 야음을 틈타 병력을 배치했다.

 

북쪽 앙량산 계곡을 통과한 돌궐군이 황하퇴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들은 황하퇴 입구에 둔치고 있는,

흑치상지의 본영을 향해 진군했다.

 

돌궐군의 본진이 모두 황하퇴에 들어설 때까지 교전은 없었다.

골돌록은 흑치상지가 보란 듯이 둔치고 있는,

폭이 20여 리쯤 되는 황하퇴 입구가 전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리가 마영향을 지났을 때,

흑치상지의 본영에서 공격신호가 떨어졌다.

본영의 군사들이 돌궐군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앞으로만 내달리던 돌궐군이 멈칫하는 순간,

응모산과 후소산 기슭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순식간에 좌우 측면을 파고들었다.

마영향에 숨어있던 군사들은 돌궐군의 허리를 끊었다.

순식간에 돌궐군은 반토막 났다.

앞뒤·좌우의 흐름이 끊기면서,

명령체계가 흩어지고 돌궐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기병이 제 기능을 하자면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돌궐 기병이 날뛸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돌궐군을 압박하자,

닫힌 공간속에서 말들이 놀라 날뛰면서, 아군이 아군을 짓밟았다.

 

황화퇴 대첩이었다.

 

돌궐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남은 잔당을 40여리나 추격하여,

그들을 고비사막 북쪽으로 내몰았다.

 

전시중일 때 군 지휘관의 명은 왕명(王命)에 앞선다.

전시의 항명은 참수형이다.

그러나 무측천이 686년 반포한 고밀제는 하극상과 항명을 법적으로 허용해준 셈이다.

 

흑치상지의 휘하에 찬보벽(爨寶璧)이 있었다.

그의 직위는 좌감문위중랑장으로, 3~4천 명 가량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이었다.

찬보벽은 흑치상지의 지시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 전술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군공(軍功)을 질투했던 찬보벽은 무측천에게 소를 올렸다

 

‘골독록의 돌궐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는데 흑치상지가 추격을 금지시켰다.

허락만 내리면 그들을 추격하여 완전히 소탕하고 앞으로의 걱정거리를 뿌리 뽑겠다’

 

무측천은 애매모호한 교서를 내린다.

‘상지와 협의하고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 도와라’

 

이 교서 자체가 이미 항명의 용인이다.

전투 지역에서 위아래 동등권을 준 것이다.

찬보벽이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무측천에게 소를 올렸다는 것으로 보건대, 입김이 센 명문가의 자식일 가능성도 많다.

고비사막의 작전 지역은 넓다.

찬보벽과 흑치상지의 주둔지 간격이 멀었던 모양이다.

 

황화퇴 전투가 끝난 두 달 후 10월에

찬보벽은 흑치상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추격에 나섰다.

정병 1만3천을 데리고 갔는데,

어떻게 자신의 지휘 권한을 훨씬 넘어서는 군사들을 동원했는지 모르겠다.

어디에나 공을 탐하는 무리는 많은 법이고,

돌궐군의 무서움을 맛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황화퇴 대첩이 원인이기도 했다.

 

찬보벽은 10여 일 동안 2천여 리를 추격하여 원진 휘하의 돌궐군과 만났다.

그러나 돌궐군의 유인과 매복에 걸려 몰살당하고,

찬보벽과 함께 되돌아온 자는 겨우 1백여 명이었다.

무측천은 찬보벽의 목을 베었다.

 

흑치상지묘지명에는,

찬보벽의 실수로 흑치상지의 군공이 모두 흩어져버렸다고 했다.

황하퇴 대첩으로 그의 명성이 당(唐)을 뒤흔들었으나,

대첩에 따른 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그는 회원군 경략대사가 되어 오르도스 지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쪽 유목민족의 중원침입 주 경로는 크게 두 곳으로 볼 수 있다.

산서성 안문관 일대와 섬서성 오르도스 지방이다.

지금의 은천 지역인 회원군(懷遠郡)은 융적, 흉노, 돌궐 등 유목민족의 주 침입로였다.

영주(靈州)와 하주(河州)는 은천의 옛 지명들이다.

 

흑치상지는 이 두 곳을 모두 경략했다.

연연도행군대총관, 신무도경략대사가 되어 삭주와 안문관 일대를 평정했고,

회원군경략대사가 되어 오르도스 지방을 안정시켰다.

 

오르도스는 투구모양으로 황하가 흐른다고 하여, 하투(河套)로 불린다.

진·한(秦漢) 때까지는 하남(河南)으로 불리던 땅.

고대로부터 북방과의 치열한 전투로 몸살을 앓았던 곳.

지금은 만신창이로 변해 붉은 황토가 핏빛으로 흐르는 곳이다.

 

토인비는 되풀이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초혼의 망령’이라 했다.

 

9백여 년 전 오르도스 지방의 흉노를 밀어내고,

하남 요로(要路)에 장성을 구축했던 진나라 몽염(蒙恬).

안문관에서 흉노 10만을 격파했던 조나라 이목(李牧).

그 둘의 비극적인 죽음.

 

그러나 죽음만을 두고 어찌 원혼(冤魂)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영예와 굴욕은 함께 따르는 것이며,

생사는 명(命)이라.

귀의하는 바가 모두 하나일진대

어찌 부인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하리오.

 

榮辱必也 死生命也 苟同於歸 何必終於婦人之手矣

흑치상지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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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의 인품에 관한 일화가, 자치통감과 구당서 흑치상지열전에 실려있다.

 

‘상지는 일찍 자신이 타던 말을 병사 때문에 잃게 되었다.

부사 우사장(牛師獎) 등이 그 병사를 벌줄 것을 청했다.

상지가 말했다.

‘어찌 개인의 말을 잃었다고 관병을 벌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병사를 용서해주었다.

상지는 자신이 상으로 하사받은 금이나 비단 등을 모두 수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2019년 04월 03일 19시 35분   조회: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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