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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의자왕 이후) 백제왕 부여융(扶餘隆)  
노성매

  

삼국사기 흑치상지열전[=신당서의 기록]

 

임존산에 의거하여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귀의한 사람이 3만이었다.

소정방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가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했다.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常之]遂復二百餘城

 

25사 대부분, 백제는 5부 37군 200성 76만 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당연합군이 물러간 후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백제전역이 거의 회복되었다.

 

 

흑치상지의 힘이 임존성에서의 용병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거대한 배후세력도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소정방과 김유신이, 임존성 하나 때문에 본국으로 회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 잔여세력의 반격을 두려워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적지에서, 앞뒤로 적에게 에워싸이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은 없다.

임존성 공격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당군과 신라군이다.

소정방은 열흘, 김유신은 보름 정도 버티다가, 등이 위태하기 전에 본국으로 서둘러 회군을 하고 만다.

 

흑치상지가 거느린 암중의 백세세력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백제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의자왕 항복=백제멸망=당의 5도독부 설치

 

이 맹목의 공식 안에서 의자왕 이후의 백제역사가 재단된 까닭에, 흑치상지와 복신과 도침의 군사력을 누를만한 당의 압도적인 무력이 백제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는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웅진도독 부여융과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사실로 굳어졌다.

 

 663년 부여융의 귀국과 함께 당(唐)이 흑치상지와 접촉했다는 기록이 신․구당서, 삼국사기의 흑치상지열전에 동일하게 보인다.

 

용삭 3년(663년)에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초유를 하자, 상지가 그의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항복했다.

舊唐書黑齒常之列傳

龍朔三年 高宗遣使招諭之 常之盡率其眾降

三國史記黑齒常之列傳[=新唐書黑齒常之列傳]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당 고종이 직접 초유사를 파견할 정도의 거대 세력 수장이었던 흑치상지.

 

소정방과 김유신을 좌절시키고 백제의 거대한 벽으로 존재했건만, 그는 부여풍의 시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부여융의 귀국과 함께 다시 나타난다.

 

그는 왕정의 시대, 적통 왕과 그 후계자를 위한 충(忠)으로 일관되는 세신(世臣)의 가문 적장자다.

1929년 낙양 망산(邙山)에서 발견된 흑치상지묘지명에는, 그가 평생 선왕(先王)의 그림자로 살아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선왕(先王)께서 하교하신 바가 아니면, 결코 심중에 품지 않았다.

非先王之所貽訓 必不出於企想

 

흑치상지가 先王으로 일컬을 왕은 부여융밖에 없다.

흑치상지가 당에서 활약할 때의 당왕(唐王)은 고종이었으나 무측천이 실세였다. 무측천은 흑치상지가 죽은 이후에 위(位)에 올랐고, 705년에 죽었다.

의자왕은 흑치상지 나이 서른이었을 때 당의 포로가 되었다.

흑치상지가 30대에서부터 20여 년간 함께 한 부여융의 죽음은 682년, 흑치상지의 사망은 689년이다.

 

흑치상지묘지명을  증거하더라도, 부여융은 그가 평생 충성을 다했던 ‘先王’ 즉 백제왕이었다.

 

당의 흑치상지 회유 기록은, 부여융의 백제왕 옹립에 따른 물밑접촉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흑치상지의 임존성 공격은 부여융의 백제왕 계승을 둘러싼 전투일 수밖에 없다.

임존성은 흑치상지가 당군(唐軍)을 물리친 이후,

풍왕(豊王) 시대  중추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임존성의 성주 지수신이 고구려로 도피한 것은, 억측일 수도 있으나 그곳에 있는 부여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로부터 1천4백여 년이 흐르면서  소멸되고 뒤틀리고 흩어진 백제사의 퍼즐조각을 찾아내어 맞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왜곡이란 어딘가에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부여융은 당의 지지와 흑치상지의 세력을 기반으로 백제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당(唐)의 중재로 신라와 두 번에 걸친 화맹을 하게 된다.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보면, 당은 임존성이 함락되기 전에 신라와 백제와의 화맹(和盟)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요구였다. 거절로 이어지다가 665년 2월 마침내 신라와 백제간의 1차 동맹이 이루어졌다.

웅령 화맹이다.

신라에서는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을 웅진에 파견했다. 신라와 백제간의 강역 확정이었다.

 

665년 8월에 이루어진 2차 취리산 회맹에는 문무왕이 직접 웅진으로 왔다. 확정된 강역에 대한 상호불가침 맹서였다.

신라왕 김법민과 백제왕 부여융이 마주했다. 그리고 백마를 잡아 나란히 삽혈을 했다.

 

삼국사기 문무왕5년

秋八月 王與勑使劉仁願熊津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

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而後歃血

 

구당서백제전

麟德二年(665)八月, 隆到熊津城與新羅王法敏

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而後歃血



古代 삽혈의 의식에는, 지위에 따라 사용되는 동물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부여융이 웅진도독이었다면 개나 돼지의 피를 사용했을 것이다.

 

오직 王만이 백마의 피로 삽혈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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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이감(李甘)이 지은 『우위인설(寓衛人說)』

 왕의 회맹에는 말을 생(牲)하고, 종묘의 제사에는 소를 희(犧)한다.

會盟則牲馬 宗廟則犧牛

 

*[사기색은]

닭과 개와 말의 피를 취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면,

맹서할 때 쓰이는 희생은 귀천(貴賤)이 같지 않다.

천자는 소(牛)나 말(馬)을 쓰고, 제후는 개(犬)나 돼지(豭)를 쓰며, 대부 이하는 닭(雞)을 쓴다.

史記索隱 卷十九 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盟之所用牲貴賤不同 天子用牛及馬 諸侯用犬及豭

 大夫已下用雞 今此總言盟之用血故云取雞狗馬之血


*불교용어에 마보사(馬寶祀)가 있다. 왕의 대제(大祭)이다. 고대 가장 신성한 제사로, 말을 희생으로 썼다.

(行事)Aśvajmedha-yaña,譯曰馬寶祀 國王之大祭也…

為古代最神聖之祀 祭以馬為犧牲 故有此名

 

 


 

 

( 2017년 01월 05일 09시 35분   조회: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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