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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삽혈로 되짚어보는, 부여융과 취리산회맹  
노성매



한반도의 백제영역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백제의 역사.


최치원열전, 북사, 주서 등을 참고하여 백제가 중원의 한강(漢江․漢水) 일대와 장강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동남아를 장악한 해상제국이라는 이름과 부합된다.

그리고 백제청동대향로 속에 조각된 온갖 남방 동물들이 당연시된다.

오리무중인 백제의 서부지역이 분명해지고, 흑치상지의 흑치 땅도 저 백제의 영역 안에서는 백제의 품이 된다.


백제의 200여 성과 최치원의 100만 강병은 허구가 아닌 실체가 된다.


 

↑이도학 교수 <살아있는 백제사>(2003년)



660년 제1차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을 함락했고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의례를 받았음에도 임존성 앞에서 회군을 했다.

그리고 663년 제2차 공격에는 부여풍의 왕도였던 주류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또다시 신라는 임존성 앞에서 회군을 했고, 당은 흑치상지를 회유하여 함락한 것으로 되어있다.


흑치상지가 당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흑치상지가 당에 무릎을 꿇을 이유가 의혹으로 남게 된다.


‘나당연합군=당의 압도적인 힘’이라는 기본 선입견을 제거하고 보면,

전성기에 1백만에 육박했던 백제의 강병이 전면에 드러난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적어도 5십만이라는 병력은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 5방 전역에 흩어져있던 백제군이 북방 웅진성의 비보(悲報)를 접하고 임존성의 흑치상지에게로 몰려든 것이 그로부터 보름지간.

백제 5방 전역의 2백여 성이 당과 신라를 압박했다.

소정방과 김유신은 재빨리 몸을 빼 각 나라로 회군했다.

고대 전쟁의 목적은 ‘영토확장’이다.

신라와 당은 임존성 앞에서 회군하면서 공동 점령지 웅천의 수비를 목적으로 신라군 7천, 당군 1만을 남겼다.

우리는 항복받지 못한 백제의 2백여 성의 존재는 무시하고,

나당연합군의 회군을 ‘당이 백제를 정복했다’로 결론 내리고 만다.


그리고 663년의 제2차 임존성 공격을 보자.

신라군 5만은 파죽지세로 부여풍의 왕도 주류성을 무너뜨리고 임존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기지못하고 회군했다. 신

라가 당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백제 잔여세력의 반격을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잔여세력의 중심에는 흑치상지가 있었다.

그는 나당공격을 번번이 저지시키는 백제의 거대한 벽이었다.

그가 거느린 암중의 백제세력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백제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의자왕의 항복=백제멸망=당의 5도독부 설치

이 공식 안에서 의자왕 이후의 백제 역사가 재단되고, 거대한 대당제국이라는 사대주의가 머리를 잠식한 까닭에,

부여융의 웅진도독, 흑치상지의 당에 대한 항복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버렸다.


백제사의 결정적인 오류는,

의자왕 이후 부여풍 시대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되고 오로지 당에 의한 웅진도독부만 강조된 역사관이다보니,

흑치상지의 세력을 누를만한 당의 압도적인 무력이 백제에 존재했는가의 여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대이건 현재이건 전쟁의 승패란 무력(武力)으로 결정된다.

당서에는 흑치상지의 항복, 임존성 공략, 그리고 부여융의 웅진도독으로 연결시킨다.

뒤집어 말하면 흑치상지가 항복하지 않았다면 임존성 공략은 소정방 때처럼 불가했을 것이다.

부여융 역시 웅진도독이 될 수 없었을 것은 자명하다. 결국 흑치상지의 항복은 부여융의 웅진도독으로 연결된다.


흑치상지의 세력은 손인사와 유인궤의 1만 군사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하다.

그런데 흑치상지가 당에 항복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를 다시 세울만한 무위와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임존성의 그에게로 몰려들었던 백제의 2백여 성과 3만여 명의 사람들을 보자면 민심도 그의 편이었다.

소정방이나 김유신조차 꺾지 못했던 흑치상지의 세력이다.

후일 흑치상지의 당에서의 활동을 보면, 그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은 동아시아 최고였다.

무측천은 탄식했다고 한다.

‘백제가 흑치상지를 거느리고도 어떻게 멸망할 수 있었는가’



흑치상지가 처음 사서에 등장한 것은 웅진성에서의 의자왕의 항복의례 때이다.

그러나 탈출하여 임존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당의 소정방과 신라군을 패배시켰다.

당시 백제의 2백여 성이 그에게로 합류했음에도 이후 그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부여풍의 시대에 그는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부여융의 귀국과 당고종의 초유사 파견과 함께 흑치상지는 다시 사서에 등장한다.


부여융의 귀국과 함께 당(唐)이 흑치상지와 접촉했다는 기록이 신․구당서, 삼국사기의 흑치상지열전에 동일하게 보인다.


용삭 3년(663년)에 당의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초유를 하자, 상지가 그의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항복했다.


舊唐書黑齒常之列傳

龍朔三年 高宗遣使招諭之 常之盡率其眾降

三國史記黑齒常之列傳[=新唐書黑齒常之列傳]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당 고종이 직접 그에게 초유사를 파견할 정도의 거대 세력으로 존재했건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흑치상지.

우리는 그가 계속 임존성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그리고 임존성을 흑치 땅으로 비정한다. 그는 흑치의 군장이다. 흑치는 그의 가문에 세습된 봉지이다.

흑치상지가 죽은 후의 군호는 흑치부군(黑齒府君)이었고, 그의 아들 흑치준 역시 흑치의 수장인 흑치부군으로 묘지명에 새겨져있다. 흑치 땅이 흑치상지 이후에도 계속 세습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부여융이 백제로 돌아왔을 때 임존성의 성주는 지수신(遲受信)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임존성과 흑치 땅을 동일하게 보고 있으나, 임존성은 웅진성으로부터 불과 90리 떨어진 곳이다.

주(周)나라 이후 봉지(封地)의 세습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왕성으로부터 사방 1백리 이내는 왕의 직할령이었다.

임존성은 왕의 직할령에 포함된 지역이며, 후일 성주가 지수신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임존성이 흑치 땅이 아님은 분명하다.


흑치상지는 웅진성을 벗어나 나당의 공격을 물리치기위해 가까운 임존성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고,

복신이 임존성을 거점으로 정한 이후에는 다시 흑치 땅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서부를 철통같이 방어하며 백제의 거대한 벽으로 존재했던 흑치상지와 대면하게 된다.


백제 서부의 거대한 벽 앞에서 신라는 또다시 회군했고, 당 조정은 흑치상지와의 협상카드로 부여융을 내세웠다.

부여융의 백제왕 옹립이었을 것이다.


충과 의를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이 흑치상지를 백제의 제일 충신으로, 백제조의 배향신하로 올린 이유일 것이다.

1929년 낙양 망산(邙山)에서 발견된 흑치상지묘지명에는, 그가 평생 선왕(先王)의 그림자로 살아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선왕(先王)께서 하교하신 바가 아니면 결코 심중에 품지 않았다.

非先王之所貽訓 必不出於企想


부여융의 죽음은 682년, 흑치상지의 사망은 689년이다.


흑치상지묘지명에는 그의 주군이 선왕(先王) 부여융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여융은 당의 세력을 등에 업고, 흑치상지의 세력을 국내 지지기반으로 하여 백제왕에 오를 수 있었다.

제나라 전단이 즉묵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여 민왕(閔王)의 아들 법장을 양왕(襄王)으로 옹립할 수 있었던 것에 빗대어 말할 수 있을까.[참고/통감 연제혈투]


이후 1천4백여 년이 흐르면서 심하게 뒤틀리고 소멸되고 흩어진 백제사의 퍼즐조각들을 찾아내어 맞추기란 쉽지 않으나, 진실이 아닌 왜곡이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백제로 돌아온 부여융은 당(唐)의 중재로 신라와 두 번에 걸친 회맹을 맺게 된다.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보면,

당은 임존성이 함락되기 전에 신라와 백제와의 화맹(和盟)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요구였다.

거절로 이어지다가 665년 2월 마침내 신라와 백제간의 1차 동맹이 이루어졌다. 웅령 회맹이다.

신라에서는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을 웅진에 파견했다. 신라와 백제간의 강역 확정이었다.


665년 8월에 이루어진 2차 취리산 회맹에는 문무왕이 직접 웅진으로 왔다.

확정된 강역에 대한 상호불가침 맹서였다.

신라왕 김법민과 백제왕 부여융이 마주했다. 그리고 백마를 잡아 삽혈을 했다.


이로써 당은 신라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부여융의 백제왕 자리를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 2017년 01월 05일 09시 35분   조회: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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