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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와 북방민족의 장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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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와 북방민족의 장묘제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최근사진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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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고구려
 
 
연대   414년(장수왕3년)
 
 
유형/재질   비문 / 응회암(凝灰岩)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높이 6.39m/아래부분 너비 1면 1.48m, 2면 1.35m, 3면 2.00m, 4면 1.46m/기단길이 3.35m, 너비 2.7m
 
 
출토지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소재지   (중국)-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서체   예서(隸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조선시대에 광개토왕릉비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황제의 비로 이해하였으며, 1880년 무렵에 이끼와 넝쿨을 제거하고 능비를 새롭게 조사한 결과 광개토왕릉비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능비는 높이 6.39m의 웅장한 화강암으로 서체는 예서(隸書)이다. 글자는 1775자를 새겼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의 판독이 어렵다. 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성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 일대에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세번째 부분에서는 능비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의 숫자와 출신지, 그와 관계된 법령을 서술하였다. 현재 능비에는 광개토왕대의 영토확장과 5세기 고구려의 천하인식, 그리고 삼국과 왜와의 국제관계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어 고대사 연구의 일급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신묘년조(辛卯年條)의 기사는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하여 한일 역사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단행본)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논문)李道學, 2003, 「광개토왕릉비의 건립 배경 -평양성 천도와 관련해서-」『白山學報』65
(논문)李道學, 2002, 「廣開土王陵碑文의 思想的 背景」『韓國學報』106, 一志社
(논문)손환일, 2002, 「高句麗 廣開土大王碑 隸書가 新羅 書體에 미친 영향」『高句麗硏究』13
(논문)이도학, 2002, 「광개토왕릉비문의 國烟과 看烟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 -被征服民 施策과 관련하여-」『韓國古代史硏究』28
(논문)張傚晶, 2002,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 21년조 기사 검토 -평양성의 위치비정을 중심으로-」『高句麗硏究』13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논문)박진석, 2001, 「북경에서 새로 발견된 일부 호태왕비탁본의 採拓年代 고증」『韓國宗敎』25, 圓光大 宗敎問題硏究所
(논문)李鍾學, 2000, 「廣開土王碑文10年 庚子條의 新考察 -蔚山地域 積石塚의 수수께끼를 벗긴다-」『慶州史學』19, 慶州 東國大學校 慶州史學會
(논문)張傚晶, 2000, 「고구려왕의 平壤移居와 왕권강화」『龜泉元裕漢敎授定年紀念論叢』(上), 혜안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第一面)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
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
弔卅有九寔駕棄國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
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
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

(第二面)
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
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
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第三面)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
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
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第四面)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
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
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
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
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
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
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해석자 : 노태돈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최근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의 옆면 사진을 두고 가짜론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는데 비석 자체는 廣開土太王의 업적을 새긴 것이므로 가짜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비석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새웠는가? 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에 싸여있다고 볼 수 있다.
 
주류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장수태왕이 세운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지만 뚜렸한 증거가 없는 가운데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마치 처녀가 지아비도 없이 혼자서 임신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본인은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이곳에 세운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
 
즉, 장수태왕이 이 비석을 세운것이 아니라 훨씬 후대에 한반도에 주권을 확립한 어떤 세력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북방민족이 남하하여 한반도로 남침해오는 것을 경계할 목적으로 " 여기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후손들이 지키는 곳이니 더 이상 쳐들어 올 생각은 하지말라" 는 상징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기위해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광개토태왕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비석이 장수태왕시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절대로 이곳에 세워졌을 이유가 없고 또한 장수태왕의 유물이 딸랑 이것하나만 여기에 있는것도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그 밖에 누가 이碑를 세웠다 던가하는 등의 자세한 내력이 적혀있지 않는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북방민족의 장묘제도를 유심히 살펴 보면 석비(石碑)가 없습니다. 아예 무덤자체를 은폐시켜 버린것도 있고...

마치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 도굴이 될까봐 감추어졌듯이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도굴의 위험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묘비를 생각하는 개념이 중원의 동이민족들 과는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비석을 세운다는 것은 죄지은 자를 표시해 두는 상징물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독수리에게 맞겨 사라지게하는 조장(鳥葬)이나 소위 풍장(風葬)이라하여 바람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분산되기를 바라는 장례를 치루어서 죽은이가 이승과의 인연을 빨리 끓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던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의식 속에서 비석을 세운다는 것은 죽은자가 여기에 뭍혀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는 것이고 또한 죽은자의 미래를 후세인들에게 맡겨 두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묘를 지키지 않는 이상 도굴이나 적들의 보복 등 외부로 부터의 유해에 대하여  그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유목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암담한 일이지요. 정착생활을 하지 않는 관습으로 그들의 장례문화는 후한을 남기지 않는 방법으로 진행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방유목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석비를 세우거나 고인돌을 만드는것 등은 죄지은자가 뭍혀있음을 표시해 두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고인돌에 대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중원대륙의 장묘제도와 북방유목민의 장묘제도가 혼합된 형태를 보이는 경주의 고분들은 껍데기만 대륙의 모양을 갖추었고 그 속의 것들은 북방민족의 제도 이며 석비를 세우지 않는 것 또한 북방민족의 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주에 있는 고분들의 주인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계북방민족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경주가 있게 된 것은 고려시대 말기 또는 조선시대초기 라고 보아 집니다. 대륙의 경주에서 그 유민들이 이동해 온 것입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의 비문에는 선조(先祖) 왕들의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운 적이 없다고 하였고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의 명에 의하여 처음으로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묘를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였고 수묘인이 되면 평생 동안 代를 물려가면서 묘를 지키게 하고 그 권리를 팔지 못하게 엄하게 규제하라고 명시해 두었습니다. 

이기록만 보아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고구려 왕들의 능묘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게 애매모호하게 기록해 두었으며 오직 동명성왕만이 용산이라는 곳에 장사(葬事) 지냈다고 밝혀두고있습니다.

예를들자면

두곡동원, 대수촌 언덕, 민중원의 석굴에 장사지낸 민중왕, 모본 언덕에 장사지낸 모본왕, 고국곡, 고국천 언덕, 산상릉, 시원(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부름), 중천 언덕, 서천 언덕, 봉산 언덕, 미천 언덕 ....


이것이 과연 역사가로서 제대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양심을 져버린 모종의 음해가 있었던 것인지 또 아니면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의 비문에 적힌 것 처럼 선조(先祖) 왕들의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운 적이 없다고 하였던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해서 지금 찾을 수 없게 된 것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감사합니다.


2007.1.24

 

 

 

 

 

( 2009년 03월 18일 19시 19분   조회:2990  추천: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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