씠 肄섑뀗痢좊 蹂댁떎젮硫 Abode Flash Player(臾대즺)媛 븘슂빀땲떎.

 
 
 
  HOME >게시판
금인(金人)의 나라 흉노(匈奴)  
bc8937


금인(金人)의 나라 흉노(匈奴)


금인(金人)...

 

금인(金人)은 '옷에 금칠을 한 사람' 이나 '금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 또는 '온몸이 금빛인 사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설가 김용길님이 쓴 동명의 소설에는 '황금인형'으로 묘사 되는데 여기서 금인(金人)은 하늘이 내려주었다고하여 천부금인(天符金人)이며 전설의 천부금인을 얻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진(秦)의 천하통일과 신라의 천년사직, 그리고 대금(大金), 대청(大淸)이 나라를 세운 것은 모두 천부금인(天符金人)을 얻은 결과였다고 역설한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금인(金人)의 신비감을 느끼게해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역사상의 기록중 최초로 금인(金人)을 언급한 것은 고려대장경 속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서문에 의한 것으로 후한의 효명제(58∼75년 재위) 때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서역에 있었던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가져 온 불경을 낙양의 백마사에서 번역하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의하면, 後漢의 효명제(58∼75년 재위)가 어느날 꿈을 꾸었더니 몸에 금옷을 입은 금인(金人)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궁정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하고, 이 때에 왕이 사자를 대월지국(大月支國)에 보내어서 부처님의 경전을 베껴 오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미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장건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것과 설정이 비슷하여 그 진위를 의심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漢) 무제(武帝)는 장군 곽거병(藿去病)을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하였는데 곽거병(藿去病)은 흉노로 부터 금인(金人)을 빼앗아 부수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금인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었다고 한다.(漢書)

 

그외에 기록보다는 전승되어진 것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12금인을 만들었다는 說이 있고, 진(秦)나라 때 서역의 사문(沙門)인 실리방(室利防)이 다른 승려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지니고 진(秦)나라에 왔을 때 시황제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승려들을 투옥시켜 버렸는데 그 날 밤에 키가 6장(丈)이나 되는 금인(金人)이 나타나 감옥을 부수어 버린 일에 시황제가 깜짝 놀라 불도를 받아들였다는 說 등이있다. 

 

 

... 이 說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인정하였다.
... 실리방은 아쇼카 왕이 파견한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
...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금인(金人)은 서역(아쇼카) . 월지국 . 흉노에

    있었음을 당시 대륙사람들은 인식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금인(金人)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탄생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석가 (釋迦 BC. 968 계축년)의 출생년도로 보면 금인(金人)은 최소한 BC. 968계축년 4월 8일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금인(金人)의 형상중 대표적인 것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금색을 입힌 불상(佛像)을 생각하면 된다. 드물지만 철불(鐵佛)도 금인(金人)이라고 볼 수 있다.  철불(鐵佛)의 철(鐵)은 쇠철을 말하는 것이고 金의 훈은 '쇠'로 '철'과 같기 때문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시황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12금인을 만들었다는 說이 이에 해당한다.

 

사기(史記) 색은(索隱)이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쇠를 뜻하는 철(鐵)의 고자(古字)는  철(銕)이라고 하였다. 

 

쇠金 + 동이夷  ===> 철「銕」  ,  철「銕」===>   鐵  의 古字

 


史記卷二

 

 夏本紀第二. 夏禹,〔一〕名曰文命。〔二〕禹之父曰鯀,鯀之父曰帝顓頊,〔三〕顓頊之父曰昌意,昌意之父曰黃帝。 .....

索隱孔安國云:「東表之地稱嵎夷。」按:今文尚書及帝命驗並作「禺鐵」,在遼西。「鐵」,古「夷」字也。 ...

 

 색은이나 공안국의 말에 의하면 동쪽바깥의 땅을 우이(嵎夷)라한다. 지금의 글자는 상서에 이르러 임금의 명에 의해 우텰(禺鐵)이라 정해졌다.  요서에 있었으며  텰(鐵)은 옛날에  夷 자 이다.

 


[鐵古夷字也 (철(鐵)은 옛날에는 夷자였다.)] -『사기(史記)』권2-5

[鐵夷通借作 ( 鐵(철)자 夷(이)자가 변한 것이다.)] -『한서(漢書)』권28

[銕 古文鐵 ( 銕 자는 鐵(철)자의 옛글자다. 鐵(철)은 원래 銕 자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 』

 


철(銕)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尚)나라 임금이 이족(夷族), 특히 요서(遼西)에 있는 우이(嵎夷)들을 우텰(禺鐵)이라 부를 정도였다고하니 과연 글자의 모양에서 처럼 알 수 있듯이 夷가 金의 주체라는 것을 밝히고있다.

 

본 홈페이지에 올린 " 東夷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글 " 에서 밝힌 것 처럼 夷字의 핵심은 활과 화살을 표현 한 것이지만 그것의 내면에는 화살촉을 쇠붙이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東夷의 우수한 제철기술이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진태하 박사님 강의중

 

 

 

그럼 東夷의 夷字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겠습니다.

 

夷 字의 자형을 갑골문 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殷代의 갑골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것을 예전에는 사람人字로 풀었었는데 최근에 새롭게 밝혀낸 것이  이게 활(弓) 이라는 것입니다. 즉, 활(弓) 은 평상시에 활줄을 풀어 놓아야지 계속 걸어놓으면 탄력이 떨어져서 못 쓰기 때문에  이게 활은 활인데 활 줄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人字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비슷하죠? 

하지만 이 두글자는 서로 다른 글자 입니다.

 

 

 

그 다음에 맨글어 진 것이  이겁니다. 활을 그리고 그 위에 화살을 엊져서 그렸습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활과 화살이 맞죠?  이게 夷 입니다. 그래서 東夷는 동방에 활을 잘 쓰는 민족이다란 뜻이예요. 갑골문에 사람人字 와 비슷해서 혼돈이 생기므로 나중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활위에 화살까지 얻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분명해졌습나다.

 

계속해서 ....

 

한자는 도안화 되지요?

 

 

 

 -->  

 

 

 

 이것이 나중에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이것이 소전체에 와서는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漢代에 완성 된 夷字는 큰대(大)에 활궁(弓) 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글자 처럼 보이게 되었는데 원래의 형성 과정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東夷의 조상은 치우천황(蚩尤天皇)이며 치우는 황제에 맞서기위해 갈석산에서 철(鐵)을 캐어 병장기를 만들었다. 치우는 머리에 동(銅)으로 된 투구를 쓰고 얼굴에는 철로 만든 가면을 쓰고 전쟁을 했다고한다. 그리고 길다란 창과 칼, 큰활을 가진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닌 군병이 되었다. 그러기에 치우는 불굴의 전쟁신(戰爭神)이라고 불리운다. 요즘 말로하면 미국이 최첨단과학무기로 무장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아마도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 치우가 아니었겠는가 !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치우 처럼 철(鐵)을 캐어 병장기를 만든다는 과학적인 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제는 사나운 맹수들을 앞장세우고 밀어부치기식으로 대항하여 많은 인명 손상을 초래하였고 치우의 과학적인 최첨단 무기에 비하여 훨씬 낙후된 무기로 싸워야했다. 따라서 황제측의 전사들은 치우가 불화살로 공격을 해오면 그것을 끄기에만 바빴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황제는 신선들의 비법으로 이겼다고하는데 비바람을 불러오고 벽력을 치게하는 등 전형적인 원조무협소설을 보는 듯하다.

 

결과는 황제가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승리의 원인이 황제의 용병술에 있었다기 보다는 역사가의 붓 끝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치우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해도 치우가 만들어낸 철(鐵)로 만든 최첨단무기들이 황제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며 후일 역사가들은 치우의 과학적인 용병술에 더 큰 점수를 주고있다.

 

   

황제가 승리한 이유를 구태여 한번 생각해보면 황제는 끝까지 버티기를 잘했으며 워낙 인구가 많았고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기때문에 비록 많은 인명의 손실은 격었지만 끝까지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치우는 전쟁을 일으켜서 수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리적 영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한 민심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므로 생략하기로한다.

 

이상으로 철기시대의 전래는 바로 동이족(동철족)이 열었던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황제 . 치우시대를 거쳐 주(周)나라 이후 석가모니(釋迦牟尼) .노자 (老子) . 공자(孔子) 등 3대 성인이 출현하였다. 이른바 周시대를 전후하여 동 . 서양을 막론하고 수 많은 성인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구의 기운이 주기적으로 융성하던 때 였기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에대해 율곤선생님의 글을 인용하고자한다. 제목은 " 壇君朝鮮 의 歷史 " 이글은 요약문 이다.

 

 

 

상략....

 

 上上古時代(壇君朝鮮 제1기) 에는 특수 계층, 즉 대부(大夫:요즘 같으면 理事官 이상) 벼슬 이상만 文民을 하게 했다. 다시말해 상층 계급만이 자연사상의 道를 열 수 있도록 했다. 개중에는 몇 사람만 지목하여 자연사상의 본체인 五行의 道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요순(堯舜) 시대에는 그 누구든 자연사상의 五行인 道를 열기만 하면 등용의 기회를 주었다. 어린아이든 목동이든 농부든 부인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여 禪을 통해 五行 즉 자연사상의 道를 열기만 하면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불평불만하는 자가 없고 능력과 자질에 따라 등용되었다. 그런던 것이 夏나라 때 와서 禪을 통하지 못하면 스스로 외곽지대로 물러나는 일이 빈번해 졌다. 따라서 글공부는 하지 않고 무도(武道)에 힘쓰며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로서 힘을 길러갔다. 이때부터 흉노(匈奴)가 생기게 되고 문무(文武)의 대립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문(文)에 의한 天道에 가까운 치세로 말미암아 큰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殷나라 때 들어와 文武의 대립 양상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桓仁시대에 온세계가 한 나라였던 것이 36개 나라로 分國化 현상이 시작되었다.
 
 은상(殷商) 때는 문무의 대립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한民族은 차츰 분열로 치닫게 되었다. 文武의 중용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周나라 때 와서 약 200개의 小國이 난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말해 春秋時代가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周나라가 망한 뒤(BC.284년. 일부 史書에는 BC.314∼256년 난왕 때까지로 되어있으나 BC.284년이 끝나고 秦 魏 韓 趙 燕 楚 齊 등 난립의 싹이 돋아나 있었다) 秦나라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열리게 된 것은 모권사회의 뿌리가 부권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 동기라고 봄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단군조선 第三期는 요(堯 BC.2357년), 순(舜 BC.2284년), 하(夏 BC.2224년), 은(殷BC.1766년), 주(周 BC.1122년)까지 그런대로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부분적으로는 부족간의 알력이나 사소한 세력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BC.2357년에서 BC.284년 周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2,073년간 표면적으로 태평세월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전란이 극심했던 시대는 단군조선 第二期때 와 단군조선 第四期때 일어났다. 치우(蚩尤 BC.2707년)와 황제(黃帝 BC.2679년)간의 싸움.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촌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단군조선 第四期인 진(秦 BC.255년), 한(韓 BC.255년), 조(趙 BC.255년), 위(魏 BC.255년), 초(楚 BC.255년), 연(燕 BC.255년), 제(齊 BC.255년) 때 고구려(高句麗 BC.231년), 백제(百濟 BC.213년), 신라(新羅 BC.57년)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를 맞아 전란이 끊이질 아니했다.
 
 이상하게도 壇君朝鮮 第二, 四期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극심했다. 그러나 壇君朝鮮 第一, 三期는 평화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1, 3기는 대성인들이 출현하여 선정을 했으며, 禪과 道의 정치를 자연법칙에 따라 시정(施定)했기 때문이다.
 
 특히 춘추전국시대(壇君朝鮮 第四期) 에는 큰 나라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속에서 三國이었던 위(魏 AD.220∼265년), 촉(蜀 AD. 221∼263년), 오(吳 AD.222∼280년) 나라는 지역간의 전란이 약 40년 동안 끊일사이 없었다.


인용문 끝

 

 

흉노(匈奴)의 조상은 하후씨(夏后氏)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순유(淳維) 산융(山戎) 험윤( 允)  훈육( 粥) 등으로 불렀으며 하(夏)나라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여 주로 중원의 북쪽지역인 감숙성 내몽골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흉노(匈奴)이전에는 단지 귀방(鬼方) . 강방(羌方)으로 불렀으며 기원전3세기 이후에 흉노(匈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하(夏 BC.2224년)나라 이후 사람들이 선통(禪通)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모든 정신적인 가치 기준을 평가하는데는 오로지 학문을 열심히 닦아 道를 여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서역을 비롯한 대륙전체에서 道를 얻기위해 사람들이 천산(天山) . 곤륜산(崑崙山) . 돈황(敦煌) 등지로 모여들었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중국민족기원어탑리목분지(中國民族起源於塔里木盆地)'편의 기록에 의하면

 

上帝之下都, 太帝之居, 天皇被跡的聖地, 我們業已知道, 所謂 開天闢地, 首出御世的盤古氏, 乃套取苗 等族的人類起源設.

 

천제의 도읍지 아래 太帝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天皇이 자리한 聖地이다. 아문(我們) 즉 君臣들의 가문에서는 道를 알기 위함을 주업(主業)으로 했다. 이런 일은 天地를 개벽(開闢)하게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世上에 나타난 으뜸가는 사람이 반고씨(盤古氏)이다.

이렇게 기록한 것 처럼 고대인들의 학문을 통하여 道를 얻는 것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약 3천여 년전에 석가(釋迦)도 天山에서 공부하여 득도하였다.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가 아니라 天山이며 天山은 환인천제(桓因天帝)께서 득도(得道)한 곳이기도하다. 기록에의하면 황제(黃帝) . 요임검(堯壬儉)도 天山에서 道를 닦았다고한다.

 

득도(得道)하는 것은 상고시대에 군주가 되려는 사람에게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인 셈이다.

 

환인천제(桓因天帝) 이후 요 . 순 시대 까지는 군주들이 道를 닦았지만, 요 . 순 시대가 지나면서 학문이(學文)이 대중적으로 내려오면서 제후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道를 닦는 길이 열였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道를 닦는 일이 주업(主業) 인것 처럼 성행하던 시기였으므로 석가(釋迦) 실달다(悉達多)도 약 3천여 년전에 道를 얻기위해서 출가하였던 것이다.

 

 

... 주(周)나라  5대 목왕(穆王BC.1001∼BC.947년)이 등극하기 7년전에

    태어났으니 이때는 기원전 968년 계축년 4월 8일이다.   ...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서역(西域)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에서 태어났으며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은 주(周)나라의 변방에 있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그러므로 천축국(天竺國)은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일 뿐이지 인도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태어난 곳도 아니다.

 

15세기경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보관)에 인도에 다섯 천축국(天竺國)이 있는 것 처럼 표시하였고 史書에 천축국(天竺國)이 불교나라 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불교란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태어난 지역에서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있었던 것이고 중천축국(中天竺國)에서 불교가 성행했던 것이다.

 

이곳은 곤륜산(崑崙山) 자락을 끼고 도는 신강성(新疆省) 남부,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와 서장성(西藏省) .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 이었다. 인도(印度)의 북부이기는 하지만 인도(印度)는 아니다. 다시말하지만 천축국(天竺國)은 불교가 융성했던 지역일 뿐이고 그 옛날 그 지역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깨달음을 얻어서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글 소개


석가의 생일은 4월 8일이 아니다  

 

율곤 이중재 저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127쪽 부터 소개함...


  서역(西域)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의 국왕의 비였던 마야부인(摩耶夫人)은 22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22년 후 계축년(癸丑年)에 마야부인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도솔천(兜率天)이라는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와 마야부인의 입안으로 해의 정기(精氣)가 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때 마야부인은 꿈속에서도 흰 코끼리 이빨 16개가 입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 기쁨을 느끼는 순간, 흰 코끼리 이빨은 입 속에서 확 퍼지더니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마야부인이 계축년(癸丑年) 초에 꿈속에서 흰 코끼리 이빨 16개가 입속으로 들어가 확 퍼진 후 그 기운인 정기(精氣)가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느낀 후, 우측 옆구리 갈비뼈에서 어린아이가 나온 날짜가 음력 4월 8일이라고 했다.

마야부인은 이때부터 잉태의 기운이 있었다. 그러니까 계축년 초에 태몽을 꾸었고, 실달다를 낳은 것은 계축년 음력 12월 8일인 것으로 보인다.

실달다(悉達多)는 주(周)나라가 건국된 후 121년 후 5대 목왕(穆王B.C.1001∼947년) 때 태어났다.

목왕은 사서(史書)에는 기원전 1001년에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필자가 역사서를 고증해 본 결과 목왕(穆王) 21년에 실달다가 27세였는데, 실달다가 7세 때 목왕(穆王)이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목왕은 등극은 기원전 962년이 된다.

목왕 때는 인도(印度)에 나라가 없었으며, 천축국(天竺國)은 한(漢,BC.206∼AD.8년) 말기에 서역(西域)을 무대로 생겨났으므로, 석가(釋迦)가 태어난 지 약 9백여 년 후에 생겼다. 그러므로 천축국과 석가는 하등 관련이 없다.

석가가 태어난 서역(西域)인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은 주(周)나라의 변방에 있던 제후국(諸侯國)에 지나지 않았다.

 

석가가 태어난 서역 지역인 신강성(新疆省) 일대와 감숙성(甘肅省) 일부 지역, 서장성(西藏省) 남부인 지금의 인도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부 지역과 청해성(靑海省), 그리고 사천성(四川省)과 광서성(廣西省) 광동성(廣東省) 일부 지역까지 다섯의 천축국(天竺國)의 강역이었음을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천축국(南天竺國)은 광서성 지역과 광동성, 그리고 운남성(雲南省) 일부 지역에 속해 있었고, 실달다(悉達多)인 석가가 태어난 곳은 곤륜산(崑崙山) 자락을 끼고 도는 신강성(新疆省) 남부인 옛 이전원(伊甸園:지금의 和田) 일대와, 서장성(西藏省)과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이 중천축국(中天竺國) 지역이었음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석가(釋迦)는 마야부인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과정에서 꿈속에 있었던 음력 4월 초 8일의 그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 했으므로, 석가는 분명 기원전 968년인 계축년에 태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21년이 기묘년(己卯年)이라 했는데, 이때 석가의 나이는 27세였다. 왜냐하면 을유년(乙酉年) 2월 8일 묘시(卯時: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에 득도(得道)를 한 그때의 나이가 33세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석가는 계축생(癸丑生)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마야부인이 꿈을 꾼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석가는 기원전 968년에 태어났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또한 기원전 968년 초에 마야부인이 태몽을 꾸고 아이를 잉태한 것으로 보아서, 음력 2월 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마야부인이 계축년 2월 초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그 순간에 우측 옆구리에서 아이가 나온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다. 그렇다면 실달다를 잉태한 시각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축년(癸丑年) 음력 2월 초 8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실달다가 태어난 것은 계축년 그 해 음력 12월 8일임을 알 수 있다. 마야부인이 꿈을 꾸면서 우측 옆구리에서 아이가 태어난 꿈속의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지, 실제로 태어난 날짜는 음력 12월 초 8일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꿈을 꿀 때의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고, 잉태한 날짜는 음력 2월 초 8일이며, 태어난 날짜는 음력 12월 8일이었다. 그리고 석가가 득도(得道)한 날짜 또한 을유년(乙酉年) 음력 2월 8일 새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초 8일과는 매우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음력 8일과 23일은 만조(滿潮) 때다. 만조란 바다물이 꽉 차게 들어와 있을 때의 밀물이다. 이때의 달은 반달로 지구와는 약간 반대쪽에 있다. 다시말해 태양과 지구에 가려있는 상태를 뜻한다.

경상도에서는 밀물, 즉 만조 시기를 조금 때라 말한다. 바다물이 꽉 차 있는 때이다. 그렇다면 초 8일과 23일은 천체의 태양과 지구, 그리고 인간과의 기력(氣力)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성인(聖人)이 태어난 날짜는 대개 조금날인 음력 8일과 23일의 밀물 때임을 알 수 있다.

석가가 태어나기 전 마야부인의 꿈에서도 음력 4월 8일이고, 잉태한 시기 또한 음력 2월 8일이며, 태어난 실제 생일은 음력 12월 8일이며, 도(道)를 통한 날짜도 33세 을유년(乙酉年) 음력 2월 8일이라면, 우연 아닌 필연적인 인과(因果)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석가는 득도를 통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法則)을 설파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석가의 생년월일이 계축년(癸丑年) 음력 12월 초 8일이라면, 간지법(干支法)으로 따지면 계축년(癸丑年) 을축월(乙丑月)이 된다.

계축년(癸丑年)은 간지법으로 보면 시대적인 전환기인데, 석가는 시대적인 전환기를 타고 났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을축월(乙丑月) 즉 음력 12월은 인생의 고난(苦難)을 뜻한다. 계축년이 상자목(桑 木)에 해당하므로, 석가는 굳건한 정신적 의지와 강인한 사상관으로 뭉쳐진 체력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적 전환기에서 굳은 의지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음력 12월인 을축월(乙丑月)은 인생의 기복을 뜻하는 전환기를 말하며, 특히 을축월(乙丑月)은 인간의 고해(苦海)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석가는 연등(燃燈)이 행한 안정도(安定道), 즉 안전하게 도(道)를 통하게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굳이 고행의 득도길로 나서게 돈 것은,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대로 계축년 을축월인 음력 12월이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순응한 운명적인 삶의 과정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음은 당(唐)나라 태상(太常)이었던 하성식( 成式)이 저술한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정이교론(正二敎論)에 있는 원문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論稱道經云老子入關之于天竺維衛國國王夫人名曰淸妙老子困其晝寢乘日之精入淸妙口中後年四月八日夜半時剖右腋而生墮地卽行七步擧手指天曰天上天下唯我爲尊三界皆若何可樂者於是佛道興焉.

 

노자(老子)가 산해관을 지나 천축유위국으로 갔을 때, 천축유위국(天竺維衛國) 국왕부인의 이름은 청묘(淸妙)였다. 노자가 곤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해의 정기가 청묘의 입속으로 들어간 후 4월 8일 밤에 청묘의 우측 겨드랑이가 갈라지더니 아이가 태어나 땅에 떨어지는 즉시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爲尊)이라 했다.…

 

본문에서 노자(老子)는 기원전 661년 전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孔子)보다 60년이 앞서 있다. 천축국(天竺國)인 다섯 천축국이 생긴 것은 전술한바와 같이 한(漢,BC.206년)나라 때 생겼으므로 노자(老子)보다 약 4백 년 후가 된다.

본문에서 노자(老子)가 말한 천축유위국(天竺維衛國)은 후에 생긴 천축국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섯 천축국이 있을 때가 아니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천축유위국은 노자보다 302년이나 앞선 석가(釋迦)가 태어날 때 있었던 일을 노자가 말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천축유위국을 한(漢)나라 말기에 생긴 오대천축국(五大天竺國)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므로, 필자는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에 의해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기록하므로 독자들은 착오없길 바란다.

 

본문에서 주의깊게 보아야할 것은 역시 음력 4월 초 8일은 꿈속에 있었던 날짜다. 그러기에 우측 옆구리가 갈라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이라 했다.

요즘 불교계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천상천하유아위존이란 하늘 위 땅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꿈속에 있었던 이야기다. 본문에 있는 위존(爲尊)이란 오직 내가 존귀하다는 뜻이다. 독존(獨尊)의 홀로 존귀하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천상천하유아위존의 근본적인 뜻은 전생(前生)과 현세(現世), 그리고 내세(來世)의 삼계(三界)를 거쳐 깨달음의 도에 이르렀을 때 도(道)가 흥하게 되어 즐거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그것은 곧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주창한 환인천황(桓因天皇,BC.8937년)의 깊은 도력(道力)의 설법(說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석가(釋迦)가 어디서 태어나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꿈속에 있었던 얘기를 듣고 음력 4월 초 8일을 석가의 탄생일로 하고 있는 것은 정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석가의 생일은 4월 8일이 아니다 


글 소개 끝

 

 


 

이렇게 보면 흉노(匈奴)의 거점지역과 월지국(月支國)의 거점지역은 천축국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금인(金人)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흉노(匈奴)였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당(唐)나라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 중천축국(中天竺國)편을 일부 소개해 보기로 한다.

 

  中天竺國在大月支東南數千里 地方三萬里 一名身毒 漢世張騫使大夏見  竹杖蜀布 國人云市之身毒 身毒天竺 蓋音字不同 其實一也 從月支高附以西南至西海 東至槃越 列國數十每國置王 其名雖異皆身毒也.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三萬里)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때의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의 사신으로 갔을 때,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나라사람들은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다. 비록 소리와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월지(月支)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반월국(槃越國)에 이른다. 수십 나라(數十國)가 있고 모두 왕을 두었는데, 그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다.

 

 

곽박(郭璞)은 산해경에 주(註)하면서 천독은 곧 천축국이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海經卷十三

 

山海經第十八

 

〔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쪽 나라 안과 북쪽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

 

곽박이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라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조선은 이미 <해내북경>에 보인다.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

 

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와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 東晉,AD.318∼321년) 4년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郭璞云: 「偎亦愛也, 音隱외反.」 王念孫云: 「宗炳明佛論<弘明集卷二―珂>引作『偎人而愛人』, 又引注文: 『古謂天毒卽天竺, 浮屠所興.』」 郝懿行云: 「愛之, 藏經本作愛人, 是也.《列子》<黃帝篇>云: 『列姑射山, 有神人, 不偎不愛, 仙聖爲之臣.』 義正與此合. 袁宏漢紀云: 『浮屠, 佛也; 天竺國有佛道, 其敎以修善慈心爲主, 不殺生.』 亦此義也, 玉篇云: 『偎, 愛也.』 本此. 又云: 『北海之偎, 有國曰偎人.』 以『偎人』爲國名, 義與此異.」 珂案: 宋本·吳寬抄本正作偎人愛人

 

 

곽박이 이르기를 「'偎' 역시 '愛'의 의미이다. 음은 隱偎反이다」라고 하였다. 왕념손이 이르기를 「종병의 명불론(홍명집 권2 ― 원가 주석)에 『偎人而愛人』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또 주석의 문장을 인용하여 『예전에 말하던 천독은 곧 천축으로 불타가 일어난 곳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의행이 이르기를 「'愛之'는《장경》에 본디 '愛人(남을 사랑한다)'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다.《열자·황제편》에 이르기를 『열고사산(列姑射山)에 신인이 있어 가까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선인과 성인들이 그에게 신하 노릇을 한다』 하였는데 그 의미가 바로 여기와 부합한다. 원굉의《한기》에 이르기를 『부도는 부처이다. 천축국에 불도가 있으니 그 가르침은 착하고 자비심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하며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여기서의 뜻과 같다.《옥편》에 『偎는 愛를 말한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북해의 모퉁이에 외인(偎人)이라는 나라가 있다』라 하여 『偎人』을 나라의 이름으로 여겼으니 그 의미가 여기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송본과 오관의 필사본에는 '偎人愛人'으로 바로 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끝

 

 

 

 

곽박(郭璞)은 천독(天毒)이란 명칭이 천축(天竺)으로 발전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이(東夷)의 일부 세력이 천축(天竺)으로 되었고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로 나누어져 대륙전체로 퍼져나갔다고 보아야한다.

 

수경주소(水經注疏)의 하수(河水)편에서는 천축제국(天竺諸國)은 은(殷)나라 백성들이 남쪽 또는 서역쪽으로 가서 천축국(天竺國)을 이루었다고 적고있다. 본래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에 없었다는 사실을 정사(正史)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들은 은(殷)나라 백성들 이라고 적고있다. 그렇다면 석가(釋迦)의 선조(先祖)는 은(殷)나라 였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외에 보충자료로서 천축국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

 

 

출전 :  律坤 著  " 불교의 뿌리역사 . 佛敎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


중략....

 

천축국(天竺國)을 살펴보기로 한다.

 

송(宋)나라 때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通志)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天竺後漢通焉卽漢時捐毒國也 從月氏高附以西南至西海東至磐越國 皆天竺之地 天竺有別城數百城置長 有別國數十國置王 雖各小異而俱名天竺 都臨恒河 名迦毗梨河 本名新淘源出崑崙 分爲五派總爲恒河其水. 中略

 

천축국(天竺國)은 후한(後漢) 때 있었던 나라다.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반월국(磐越國)에 이른다. 모두가 천축국 땅이다. 천축에는 독자적인 성(城)이 수백이 있는데, 각 성에는 장(長)을 두었다. 독자적인 나라도 수십이 되었는데, 왕(王)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천축(天竺)의 나라였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흐르고 있는데, 강 이름은 가비리하(迦毗梨河)였다. 본래 그 이름은 신도(新淘)로서, 원 물줄기가 나오는 곳은 곤륜산(崑崙山)이다. 이곳에서 다섯 물줄기가 내려오다가 합쳐져 항하(恒河)의 물이 된다.

 


통지(通志)의 본문을 보면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라고 했다. 연독국은 본래 신독국(身毒國)이다. 신독국의 원 뿌리는 동이국(東夷國)이 조상으로 되어있다.

 


당(唐)나라 때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에서 천축국(天竺國)을 살펴보기로 한다.

 

天竺後漢通焉 卽前漢時身毒國 從月氏 高附國以西南至西海 東至盤起 皆身毒之地 身毒有別城數百 城置長 有別國數十 國置王 雖名小異 而俱名身毒 都臨恒河 一名迦毗梨河 靈鷲山 胡語曰耆  山  山有靑石 頭似鷲鳥 其時皆屬月氏 月氏殺其王而置將 令統其人…

 

천축은 후한(後漢) 때 일컬어졌고, 즉 전한(前漢) 시에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반기(盤起) 즉 반월국(盤越國)이 있는데, 모두 신독국(身毒國)의 땅이다.

 

신독국(身毒國)은 독자적인 성(城)을 수백 개 가지고 있으며, 성(城)에는 장(長)을 두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나라 역시 수십 국(數十國)으로, 나라에는 왕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은 다르지만 모두 신독(身毒)에 속해 있었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에 흐르고 있는데, 일명 가비리하(迦毗梨河)라고도 한다. 영취산(靈鷲山)이 있는데, 몽고말로는 기도굴산(耆  山)이라 한다. 산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산 정상이 흡사 독수리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는 모두 월씨(月氏)에 속해 있었다. 월씨는 천축의 왕을 죽이고, 그곳에 우두머리를 두고 그들을 다스렸다.

 


이를 통해 보자면 전한(前漢 B.C.206∼AD.8년)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나 신독국(身毒國)으로 불리었고,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와서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렸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월씨국(月氏國) 동남(東南)에 있다고 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 월씨국을 찾아보았다.

 

 

月氏.
古國名. 先居甘肅西境. 漢時爲匈奴所破. 西走阿母河. 臣服大夏. 都河北. 曰大月氏. 留居故地者爲小月氏. 大月氏强盛時. 奄有印度恒河流域. 克什米爾. 阿富汗及蔥嶺東西地…

 

월씨(月氏)는 옛 나라 이름이다. 처음에는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경계에 거주했다.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에게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망을 간 곳이 아모하(阿母河) 강 주변이었다. 월씨(月氏)는 그곳에서 대하(大夏)라는 나라의 신하(臣下)로 복종했다. 도읍지는 아모하(阿母河)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들을 대월씨라고 한다. 그러나 옛 땅(감숙성의 서쪽 경계)에 계속 머물러 살고있는 이들은 소월씨라고 불렀다. 대월씨가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항하 유역, 극십미리, 아부한과 총령 동서 지역까지 점령을 했다…

 


大夏. 중국고금지명대사전 69쪽

晉時十六國之一. 匈奴赫連勃勃背秦稱大夏天王. 據朔方通萬城. 有今陝西西部寧夏東南部及內蒙古鄂爾多斯之地…爲吐谷渾所滅

 

진(晉)나라 때의 19국 중의 한 나라이다. 흉노의 혁연발이 있었는데, 그가 진(秦)나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라를 세워 대하(大夏)의 천왕으로 칭하고, 북방 지역의 1만 성(城)을 차지했다. 지금의 섬서성 서부, 영하 동남부와 내몽고 곽이다사의 땅이다.…토곡혼에 의해 멸망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은 전한(前漢)시 신독국(身毒國)의 후예(後裔)로서 후한(後漢) 때 천축국(天竺國)이 생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보는 것처럼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가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만 천축국이 후한(後漢) 때 와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 불교는 고대로부터 곤륜산(崑崙山) 일대에서 발생하여 후한(後漢) 때의 천축국으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천축국(天竺國)의 성(城)은 수백 군데로 되어있고 따라서 나라들도 수십 국이라고 적고있다. 이제까지 중천축국(中天竺國), 남천축국(南天竺國), 동천축국(東天竺國), 그리고 서천축국(西天竺國)과 북천축국(北天竺國) 이와같이 오천축국(五天竺國)만 있는 게 아니라 수백 곳의 성(城)과 수십 개의 나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천축국(天竺國)은 다섯 나라가 아닌 수십 국이 있었음을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후한(後漢) 초기에 천축국은 중국 대륙의 서북부와 서부, 그리고 곤륜산(崑崙山) 남부와 서장성(西藏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서부, 운남성(雲南省) 동남까지 광범위한 지역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다섯 천축국 중 가장 불교가 성한 나라는 중천축국이다.


후한(後漢 A.D.25∼220년) 때부터 진(晉 A.D.265∼420년)나라 때까지 천축국은 번성했다. 그후 위진(魏晉)시대에 다섯 천축국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양(梁)나라 무제(武帝 A.D.502∼519년) 천감(天監) 초에 천축국에서는 비단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A.D.500∼503년) 때에는 남천축국에서 준마를 바쳤다고 되어 있다.

 

천축국에서는 담비(貂) 표범(豹)등의 가죽이 많이 생산되었고 물소 코끼리 등이 많았다는 기록이다.

 

천축국은 고원지대이므로 금 동 철 아연 주석과 바위틈에서 채취된 꿀벌 생강 옥 산초 향 산호 과일 감귤 같은 과일 종류가 많이 생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역의 대진(大秦)과 남쪽에 있던 안식(安息:월남지방)과 부남(扶南)국간에 무역을 활발히 했다는 기록이다.

 

특히 천축국에서는 문자가 발달되어 천문(天文)과 역서(曆書:달력과 역술서적), 그리고 산술(算術) 서적 등이 매우 발달되었다. 또 전투용의 활, 창, 갑옷과 병법과 지리가 발달되어 고도의 문명국임을 알 수 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 A.D.605∼617년) 때는 서역의 토번국(吐蕃國) 외 여러 서역국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지만 유독 천축국과는 교역이 불통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다섯 천축국은 당(唐)나라가 들어서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나라 초기부터 서역 평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현장(玄裝) 법사가 답사할 때만 하더라도 중천축국 속에 건타라국(建馱羅國)이 있었다. 건타라국 주위에는 가엽미라국(迦葉彌羅國)이 서북으로 있었고 돌궐(突厥)도 있었다. 돌궐 주위에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어 계빈( 賓) 왕과 돌궐 왕들은 강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위서서역전(魏書西域傳)》《고승전(高僧傳)》《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서북부 주위로는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 賓), 언기(焉耆), 구자(龜慈),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 ), 구반(句盤) 등의 강대국이 있었다. 이들 나라 남동쪽에는《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제5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허황옥(許黃玉)의 조국인 아유타국(阿踰 國)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아유타국은 중천축국의 제후국인 셈으로 건타라국의 옛 도읍지에 인접해 있었던 나라이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천축국의 속국이었으며 불교의 본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유타국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숭앙하고 있었음을《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밝히고 있다.

 

오천축국(五天竺國)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통전(通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天竺後漢通焉. 卽前漢時身毒 國初張騫使大夏 見 竹杖蜀布 問曰安得此 大夏國人曰 吾賈人往身毒國市之 卽天竺也 或云摩伽  或云婆羅門 在 嶺之南 去月氏東南數千里 地方三萬餘里 其中分爲五天竺 一曰中天竺 二曰東天竺 三曰南天竺 四曰西天竺 五曰北天竺 地各數千里 城邑數百 南天竺際大海 北天竺距雪山 四周有山爲壁 南面一谷 通爲國門 東天竺東際大海與扶南 林邑 接 但隔小海而已 西天竺與 賓 波斯相接 中天竺據四天竺之閒 國 有王 漢時又有捐毒國 去長安九千八百里 去都護理所二千八百里 南與 嶺相連 北與烏孫接 衣服類烏孫 隨水草 故塞種也 顔師古云 捐毒卽身毒 身毒則天竺也 塞種卽釋種也.

 

천축은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있었다.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전한 초에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얻었으냐고 대하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독국의 시장에 가서 사왔다고 했다. 신독국이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천축을 혹 마가타(摩伽 )라고도,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했는데, 총령( 嶺)의 남쪽에 있었다.

즉 총령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뜻한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남부이며 서장성(西藏省) 북부지역을 말한다.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인데, 지역은 3만여리(三萬餘里)였다. 여기서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그 강역이 3만여 리라고 한다면, 인도(印度) 항하(恒河) 북쪽으로 천축국이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장성(西藏省)에서 운남성(雲南省), 감숙성(甘肅省) 북부, 청해성(靑海省) 등지에 걸쳐 있는 거리라고 보아야한다. 한반도 전체가 3천리(三千里)임을 비교해 보면 10배가 되는 강역이라고 보아야한다.

 

천축(天竺)은 다섯 천축으로 나누어졌다. 첫째 중천축(中天竺), 둘째는 동천축(東天竺), 세째는 남천축(南天竺), 네째는 서천축(西天竺), 다섯째는 북천축(北天竺)인데 각각 그 지역이 수천리(數千里)였다. 그리고 성(城)과 읍(邑)은 수백(數百) 곳이었다. 남천축국은 대해(大海)와 접해 있었다. 북천축국은 설산(雪山) 가까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막혀 있는데, 남쪽으로 계곡이 있어 나라의 문으로 통하고 있다. 동으로는 동천축국(東天竺國)이 있었는데 대해(大海)의 경계라고 했다.

  

여기서 동쪽 지경에 있는 큰 바다라면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이나 복건성(福建省)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특히 동천축국은 부남(扶南)과 임읍(林邑)과 인접해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부남(扶南)은 베트남의 접경지대까지를 말하며, 임읍(林邑)은 태국(泰國) 북부지역을 뜻한다. 그리고 부남(扶南)과 임읍(林邑)은 소해(小海)로 막혀 있다고 했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은 계빈( 賓)과 파사(波斯)와 서로 접해있다고 했다. 계빈( 賓)은 신강성(新疆省) 접경 지대이며, 파사(波斯)는 신강성과 파미르 고원과의 접경지대에 있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네 천축국 사이에 있었다. 오천축(五天竺)에는 모두 왕(王)이 있었다.


한(漢)나라 때는 또한 연독국(捐毒國)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80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9,800리라고 한다면 신강성(新疆省) 남부에 있는 지금의 화전(和田)인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를 말한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국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천축국(天竺國)에 대한 고증본은 다음과 같다.

 

태평어람(太平御覽)·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통지(通志)·후한서(後漢書)·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위서(魏書)·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구당서(舊唐書)·당서(新唐書)·양서(梁書)·책부원구(冊府元龜)·송서(宋書)·법화경(法華經:일명 妙法蓮華經)·금강경(金剛經)·아함경(阿含經)·반니원경(般泥洹經)·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중본기경(中本起經)·소품반야파라밀경(小品般若波羅密經)·통전(通典)  등

 


천축국(天竺國) 보충자료 끝

 


본문 시작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서문에 서역에 있었던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불경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있는데 그 이전의 기록에는 사신만 왕래했지 불경(佛經)이나 금인(金人)을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흉노(匈奴)가 제천금인(祭天金人)하였다는 기록이 한서(漢書)에 있고 한(漢) 무제(武帝)때 장군 곽거병(藿去病)은 흉노로 부터 금인(金人)을 빼앗아 부수어버렸다고하였으니 금인은 흉노(匈奴)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천신(天神)은 유목민족의 신(神)이다. 바로 단군(壇君)을 뜻한다. 단군(壇君)은 제터단자를 써야한다. 담국이 단국이고 단국(口國= 에운담 + 나라국)이며 한국(桓國)이다.

 

태고시대(太古時代)에 天山일대의 탑리목사하(塔里木斯河)의 유역(流域)에 한국(桓國)이었다.

 

단군(壇君)의 본 뜻은 봉선(封禪)을 주관하는 최고의 통치자 즉 천자(天子), 천산(天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땅위의 최고통치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들은 모두가 도통(道通)을 하였기 때문에 道를 통한민족이라고해서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즘은 단군(壇君)하면 바로 무당이라고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틀린말은 아니라고 본다.그것은 유목민사회에서 단군의 역활이 샤머니즘화 되고 무당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런 유습으로 인하여 월지국(月支國)에 금인(金人)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월지국(月支國)은 흉노(匈奴)에 의해서 서역으로 쫒겨나게 되지만 그 흥망사는 결코 흉노(匈奴)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필자는 이 모두를 흉노(匈奴)로 보고있다.

 

이장에서 대월지, 소월지, 대하, 흉노, 천축국 등을 세분화해서 구별하면 금인(金人)의 정확한 출현을 밝히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흉노라는 유목민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필자는 단연코 금인(金人)의 고향은 흉노(匈奴)라고 말할 것이다.

 

흉노(匈奴)는 공부 못하고 머리가 나쁘다고해서 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했거나  전쟁으로인한 난리를 피해서 달아난 사람들이 중원의 북쪽 미개척지로 쫒겨나서 형성된 종족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몽골의 선조가 되기도하고 돌궐 . 부여 . 고구려 등으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흉노(匈奴)가 생기기에 앞서 치우시대부터 이곳은 제철기술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치우황제가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황제(黃帝)를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원의 북쪽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무려 1만 2천년전에 발생한 흑피옥문화에서 밝혀진것 처럼 석재를 가공하는 기술과 돌을 다루는 기술 등 막말로 공부빼고는 못하는게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흉노(匈奴)제국은 머리대신 무력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단군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제천(祭天)하였으며 그 숭배의 대상으로 금인(金人)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기술의 바탕은 바로 치우황제의 동두철액(銅頭鐵額)까지이어져있다.

 

 

 

 

천산일대 東夷地 그림자료

 

 

 

 

 

 

 

 

( 2009년 02월 14일 23시 59분   조회:3987  추천:326 )   
노성매 2009-02-15 01:14:04
철과 연관된 여러 기록들



동이(東夷)란 동쪽에서 일찍부터 철(鐵)을 사용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철과 연관된 여러 기록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박시인(朴時仁) 교수「天山」

113쪽…한국인은 알타이어족의 한 지파…

132쪽∼알타이語에서「쇠,金」을 (토)altun, (몽)altan, altyn, altai, alocu, (만)aisin, (한)asi, asa, (일)asi라 하므로 알타이系人이 그 지방의 名山을 天地사이를 떠받들고 頂上에 日月이 있는 金柱라 하고, 天山 白山 金山이라 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天降한 金姓王 始祖 金(alocu) 閼智(alcu)의 이름이 되었다. 이것은 이 이야기를 지어낸 時代의 이 곳 住民이「쇠金」을 altyn, alocu라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我本治匠」이라 한 說解의 이름도 몽고어 daruyacin(君主) darhan(治匠)와 같다.

始林 改名  林은 金城西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알타이人의 많은 나라 始王이 名山에 天降한 것처럼, 新羅에서도 六村의 始祖와 天降地 金城西 始林은 金城西 名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始祖赫居世居西干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혁거세 21년 경성을 축성하여 금성이라 불렀다.



알타이山의 한자명은 금산(金山)이다.

그런데 삼국과 거의 동시대에, 안타이산록에서 일어나 신라(新羅)와 역사의 흐름이 비슷하게 진행된 돌궐에 대해 알아보면.


중국의 어제와 오늘(http://myhome.naver.com/mugam20/minzu/shaoshu1/tujue.htm)중

…고대에 흉노 이북 지역에 살던 정령(丁零)의 한 갈래로 후대의 고차(高車) 철륵(鐵勒)과 동족이다. 그들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돌궐어족에 속한다. 6세기 초엽에 금산(金山, 지금의 알타이산)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는데, 돌궐은 금산의 모양이 투구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돌궐어로 투구를 "突厥"이라 한다)

주대에 돌궐은 유연(연연)족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제련업에 능하였기 때문에 "유연의 제철공(柔然鐵工)"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유목민족제국사 57쪽∼

金山(알타이山)의 양지바른 쪽에 거주하며 茹茹(연연)의 철공들이 되었다.

金山의 모양이 투구(兜 )와 비슷하고, 그 俗語에 투구가 <突厥>이라 그에 따라 돌궐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42쪽. 돌궐은 본거지가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연연에 복속되었던 부족이었으며, 주로 철물업에 종사하였다.

48쪽. 말과 비단무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돌궐제국의 확장으로 토곡혼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58쪽 …그중 하나가 阿史那 A-shih-na라는 성을 가지고 家系를 세웠는데 여기서 몇 세대 후에 돌궐족이 일어났다.…

돌궐이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언급된 시기는 3세기 중이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알타이산맥 지역이었다.…

중국인과 희랍인의 여행기에는 돌궐인의 직업으로 철공업의 중요성이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鐵門- 분명히 실제로 철로 만든 문이었던 것 같다.-은 돌궐제국의 경계를 구획하였다.


71쪽…돌궐제국에서는 교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연(  )을 멸망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의 교역로와, 따라서 중국과 비잔틴 간에 시행되어 온 이익이 많은 비단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59쪽. 돌궐족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그 첫 天子 부민 Bumin(土門:돌궐의 건국시조 이름은 중국기록에는 <土門> 혹은 <伊利可汗>으로 기술되어 있고, 突厥文碑에는 Bumin이다)의 업적 때문이다.
…중국사료에 부민에 관한 최초의 중요한 언급은 546년 記事에 나타난다.…부민의 군사들은 그들의 남방에 거주하고 있던 丁零 Ting-ling(중국기록에 보통 鐵勒으로 자주 나타난다. 다른 형태로는 칙勒, 狄歷등. 北魏시대의 高車도 동일한 민족으로 추측되어 왔다)을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 丁零은 돌궐족의 一支派였던 것 같다.


위의 기록을 보면, 신라와 돌궐간에는 유사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① 철기문화와 비단무역의 주도세력.

② (한)asi,가 쇠(金)을 의미한다면, 阿史那 A-shih-na의 성은 결국 김씨(金氏)라는 뜻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김(金)씨라는 성 역시, 쇠/철의 뜻입니다.

무리한 억측일 수도 있으나, 공교롭게도 돌궐족의 패권을 장악한 천자의 이름은 부민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휘(諱)는 법민(法敏)인데, 1백년 정도의 연대차이는 있으나, 수천년 전의 기록임에야…

③ 왕의 호칭 돌궐→한(汗), 신라→간(干)

④ 돌궐의 경계를 구분 지었던 철문(鐵門)과, 신라의 금성(金城).

돌궐이 복속했던 철륵(鐵勒) 역시 철과 관련이 있는데, 신라가 병합했던 가야 역시 철의 왕국으로 불렸다.

금관가야가 있던 섬서성 안강현, 고령가야가 있던 섬서성 의천현 일대는(율곤학회/고대사/가야 참고) 당시 철륵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⑤ 동동궐의 멸망(634년)은 고구려의 멸망 시점과 비슷하고, 서돌궐은 당(唐)에 의해 적대관계였던 동돌궐이 와해되자, 683년경 당(唐)과 4년동안 11차의 전쟁을 감행하여 제2돌궐제국시대를 열게된다. 이 역시 통일신라의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밟게된다.

⑥ 삼국 병립 시기와 나란히 하며 그토록 위력을 떨쳤던 돌궐이건만, 이상하게도 삼국사기에는 돌궐에 대한 기록이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철과 연관된 언어와 철기문화의 주도민족들은 모두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bc8937 2009-02-15 08:34:50
 





민속에 남은 삼신신앙은 모두 신시시대의 것이다




글/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유교 등 외래종교가 들어와서 신시시대의 우리 고유문화가 잠적하여 민속문화로 살아남거나 불교나 유교문화의 일부가 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그 좋은 예가 지석묘라는 것이다. 일명 지석단이라고도 하는데 제석단帝釋壇이라고도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신시시대의 천제단이거나 신단들이었다.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신자들이 이를 제석단이라 이름을 바꿨다.
 
『밀기』(密記)에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기를 지석支石이라 하였다.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이를 지석단支石壇이라 하였다. 혹은 제석단이라고도 하였다. 산마루에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이를 천단天壇이라 하였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하였다. 지금 승도들이 이를 혼동하여 제석이라 말하고 있는데 실제 고사古事와 다르다. (「신시본기」)
 
우리 민족종교가 불교 속에 살아남은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이란 본시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만은 대웅전이라 한다.
 
불상이 처음 들어 와서 절을 질 때 이를 대웅大雄이라 하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었다. (「신시본기」)
 
대웅전에는 본래 삼신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환웅이 제일이었다. 환인은 만물창조의 신 즉 조화造化의 신이요 환웅은 가르침의 신 즉 교화敎化의 신이요 환군 즉 단군은 다스림의 신 즉 치화治化의 신이었다. 종교란 교화다. 따라서 환웅의 이름을 빌어서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하였던 것이다. 대大는 한 즉 크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절에는 실제로 삼신을 모신 삼신각三神閣(산신각의 원명이 삼신각이다)이 있다. 한국의 사찰이라면 반드시 대웅전 옆에 삼신각을 지어 삼신을 모신다. 삼신각이 없는 절은 절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사찰에는 반드시 삼신각이 있다. 그러면 왜 절에 삼신각을 두고 삼신에게 제사를 들였을까. 여기에는 엄청난 종교전쟁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차돈이 신라에서 처형당한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차돈 이외에도 순교자가 많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사실은 기록에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은 종교 침략자 불승들은 수없이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박해 당했듯이 스님들도 단군 신도들에게 지독한 박해를 당했고 스님들이 애써 지은 사찰들이 화염에 싸여 불탔다. 그러니 절에 가는 것을 모두 꺼려했다. 그래서 절 안에 삼신각을 지어 신도를 유혹했고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 즉 환웅전이라 했다. 그래야 방화사건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도를 확보하고 나라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삼신각을 산신각이라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절에 방화하는 자도 없고 삼신각을 찾는 신도도 없어졌으니 이름을 삼신에서 산신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바꿔놓고 역사를 왜곡해도 삼신은 산신이 아니요 삼신인 것이다.
 
bc8937 2009-02-16 20:14:34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미황사의 창건


미황사에는 사찰의 창건 사실을 알려주는 당대의 기록이나 유물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고려후기의 실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미황사' 라는 절 이름이 언급되어 있고, 절의 창건 및 연기 설화에 관해서는 1692년(숙종 18)에 민암(閔암, 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迹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다고 한다 배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가 번번히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장선(張善) 두 사미(沙彌), 촌주(村主) 우감(于甘), 향도(香徒)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있었다. 그리고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 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우며 사찰을 창건하니 곧 통교사(通敎寺)요,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과 상을 봉안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국여지승람』과 「미황사사적기」의 기록을 조합해 보면 미황사는 경덕왕 8년(749)에 의조화상이 창건하여 화엄경, 법화경을 중시하며 여러 불상을 모신 사찰로 헤아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건 설화는 곧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지원년간(至元年間)(1264~1294)에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영암군(靈巖郡) 산천조(山川條) 달마산(達摩山)에 보면 「고려 때 승려 무외(無畏)의 記에 …(전략)… 그 암자(도솔암)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이 비로소 붙어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하던 곳이요, 서쪽 골자기에는 미황사(美黃寺)·통교사(通敎寺)가 있다. 지원 신사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향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하고 그림으로 그려갔으니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과 영험한 자취도 많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다.」고 합니다. 고려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은 중국인들에게도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개관 :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미황사(美黃寺)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다. 미황사가 725년에 한 배가 산 밑의 포구에 닿아 살펴보니 그 안에 화엄경 등의 경전과 불화가 들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의조화상의 꿈에 소가 경전을 싣고 가다 누웠던 두 곳에 각각 통교사와 미황사를 세웠고, 미황사의 이름도 거기에서 연유하였음을 밝혔다. 이어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한 가섭마 등과 축법란의 사유와 송대 문인의 불교와의 관계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숙종 18년(1692년)에 민암(閔黯)이 짓고 낭선군(朗善君)이 썼다. 비의 상태가 마모가 심해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후면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전면의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1에 수록되어 있다.


(단행본)조선총독부,『조선금석총람』하, 일한인쇄소인쇄, 1919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해석 및 판독문


출처 :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시적비명(事迹碑銘)과 서(序)
숭정대부(崇政大夫)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知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민암(閔黯)
장유(長孺)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관부도총관(五衛都摠官府都摠管) 이우(李俁)
쓰고 아울러 전액을 씀

내가 불교의 책을 읽다가 『화엄경(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감탄하기를 “아아. 우리 동방의 정토(淨土)의 사업이 대개 그윽히 합치되는 것이 있었던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화엄경에서 금강산에 상주한다고 하는 보살, 곧 법기(法起)보살)이 1만 2천 반야에 자리한 몸이 이와 같고, 달에 강물에 비치고 53개 철종(鐵鐘)의 자취가 또한 이와 같다. 금강산이 산이 이루어진 것이 장엄겁(莊嚴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과거) 성수겁(星宿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미래) 사이였으니 인간과 새와 더불어 수미산(須彌山,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은 산으로 그 둘레에 4대주가 있는데 인간은 그중 남방 염부제(남섬부주)에 산다고 함)과 같아서 무상의 깨달음의 경지가 된 것이 그 영험을 나타낸 것이다. 마땅히 그 밝은 옥이 크게 빛나도다.”라고 하였다.
호남의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의 창건 사적은 어찌 그리 기이한가. 당(唐)나라 개원(開元) 13년 을축년(신라 성덕왕 22, 725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8년(749년) 8월 12일에 갑자기 한 석선(石船)이 산 밑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는데 하늘과 같은 범패소리가 뱃속에서 나기 시작하여 어부들이 정박시키려고 살펴 보았더니 배가 갑자기 멀어져버렸다. 의조(義照) 화상(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과 장선(張善) 두 사미(沙彌)와 함께 촌주(村主, 지방을 다스리는 책임자) 우감(于甘)에게 이르러 향도(香徒, 향을 매개로 이루어진 불교의 신앙 공동체.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재물을 내서 불상을 만들거나 향을 묻거나 하는 등의 불사를 함) 1백인과 같이 가서 목욕 재계하고 경건하게 빌었더니 석선이 다시 해안에 이르렀다. 주조한 금인(金人, 금으로 만든 불상) 한 구(軀)가 노를 잡고 서 있고 수놓은 돛이 날리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가운데에 금으로 만든 함(函)이 있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옥축(玉軸)의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불법의 이치를 방대한 구성으로 설하여 보살도의 수행을 역설한 경전) 80권과 『법화경』(法華經, 대승의 신앙과 공덕을 설한 경전) 7권과 비로자나(毘盧遮那) 문수(文殊) 보현(普賢) 40성중(聖衆) 53선지식(善知識) 16나한(羅漢) 등의 탱화가 있고 또 금고리와 검은 돌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향도 등이 경을 가지고 해안에 내려와 봉안할 곳을 의논하였더니 검은돌이 갈라지며 검푸른 암소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얼마 안 있어 장대해졌다. 이날 저녁 금인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于闐國, 중앙아시아 호탄)의 왕입니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경전과 불상을 안치할 곳을 찾았는데 산 꼭대기를 보니 1만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왔습니다.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경전을 봉안할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에 경전을 소에 싣고 가는데 처음에 한곳의 땅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크게 소리쳐 “좋도다” 하고는 넘어져 죽어버렸다. 처음 누웠던 땅에 한 절을 세우니 지금의 통교사(通敎寺)가 이것이요, 뒤에 누웠던 골짜기에 한 절을 세워 경전과 불화를 봉안하고 이름하여 미황사라 하니 ‘미(美)’자는 소의 소리에서 따온 것이요 ‘황(黃)’자는 금인(金人)의 빛깔에서 따온 것이다.
아아 기이하도다. 세상에서 신산(神山)이라 것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달마산(達摩山)은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지맥으로 본래 좋은 경치가 많고 신성한 행적과 신령한 자취의 내응이 많다. 그때의 돌소[石牛]와 금사람[金人]의 일은 황홀하고 아득하여 세상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연대를 고증하는데 여덟 글자로 타개해야만 하겠는가. 또한 경전과 금불상 불화 등의 물건은 예부터 그대로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제불(諸佛)이 세상에 나오심은 모두 하나의 큰 일[一大事]이라 하는데 일대사라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에 집착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공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며 도중에 와서 뿔이 된 것이 어찌 설산의 회상에서 온 것이겠는가. 이는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과 함께 후한 명제 때인 서기 67년에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사람)과 축법란(竺法蘭)이 말에 실어온 고사를 본딴 것일 뿐이다. 금신(金神)이 꿈에 감응한 것은 또한 아난(阿難, 석가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석가를 항상 시종했던 수제자)이 가르침의 바다를 널리 편 유의(遺意)가 있다. 지원(至元) 연간(1264~1293년)에 이르러 만송[南宋]의 현달한 관리와 군자(君子)들이 멀리 바라보며 생각을 치달려 그림으로 그려내게 하니 이를 없앤다면 총림에서 기를 토하게 할만한 것이다. 이를 모두 비석에 새겨 영원히 나타낼 만하다. 나는 장천각(張天覺, 송의 문인 장상영(張商英))의 도리와 백향산(白香山,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호가 향산)의 문필을 모두 업신여기나 상인께서 멀리서 온 뜻을 중히 여겨 그가 말한 바에 따라 말을 잇고 또한 사물에 따르고 사물을 빈 데서 감응을 얻은 뜻을 말할 뿐이다. 명에 이른다.

돌이냐 소냐 불가사의하도다
금이냐 사람이냐 알 수 없도다
정신은 모나지 않고 교화는 무궁하도다. 아아.

숭정기원후 65년 임신(숙종 18, 1692년) 9월 일 비를 세움.
두인(杜忍)



해석자 : 장병삼






靈巖 美黃寺事蹟碑
美黃寺碑碑(篆 題) 
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達摩山美黃寺事迹碑銘幷 序
      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
      子左賓客閔黯長孺撰
      顯祿大夫朗善君兼五衞都摠官府都摠管俁書幷篆
余讀西方書至華嚴經諸菩薩住處品未甞不掩卷而嘆曰异哉我東方淨土之業盖亦有冥契者存曇無竭之據一萬二千般若」
之軀者如此月氏之印五十三鐵鐘之迹者又如此夫金剛之爲山也見在於莊嚴星宿之間與人鳥須彌同爲無上菩提之境則」
其表靈也宜其炳琅而光大也乃者湖南達摩山美黃寺之剏跡抑何奇之甚也有唐開元十三年乙丑新羅景德王八年八月十」
二日忽有一石舡來泊于山底獅子浦口天樣梵唄之聲迭發於船中漁人欲迫而察之則舡輒遠義照和尙聞之與張雲張善二」
沙彌曁村主于甘香徒一百人同往齋 沐虔禱石船乃至岸鑄成金人一軀執櫓而立張以繡帆就而觀之其中有金凾具鎻鑰盛」
以玉軸金字華 嚴經八十縛法華經七縛毘盧遮那文殊普賢四十聖衆五十三善知議十六羅漢等畵幀又有金環黑石各一枚」
香徒等齋經下岸方議奉安之地黑石卽拆而生靑黑挬牛一頭倐忽長大是夕金人入和尙夢曰我本于闐國王也遍歷諸國求」
安經像望見山頂有一萬佛現相茲故來此爾宜駄經以牛牛臥不起處能卽安經之所也和尙乃以經載牛而行初臥一壤而復起」
至山峽而復臥大吼曰美因而斃焉初臥之壤剏一蘭若今通敎寺是也後臥之峽營一刹以安聖經及神幀顔之曰美黃美取牛」
之聲也黃取人之色也奇乎异哉世稱神山輒歸之三韓達摩以方丈之枝素饒眞境故有此聖迹靈踪之來應焉當時石牛金人」
事悅惚窅茫非世耳之所可剽者而年代考證下啻八字打開且貝葉金軀幀像等物故宛然也窃念諸佛出興皆爲一大事所謂」
一大事不外乎方便今茲塊然者豈自生公點頭中來而角者豈從雪山會上仍倣騰蘭駄來故事也耶金神之夢感者亦有阿難」
流通敎海之遺意焉至於至元間南宋之達官君子望風馳想致令圖寫而去則亦足爲叢林吐氣此俱可以書諸貞珉標之永永」
者也余於張天覺之理白香山之筆皆蔑蔑如而重上人遠來之意因其所述而詮次之又有感於循物假物之義云爾銘曰石耶牛耶不可思  金耶人耶不可知  神無方而化無涯嘻噫
崇禎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 日立碑杜忍



판독자 : 정병삼
bc8937 2009-02-16 20:29:35
대한민국은 동방의 정토(淨土)

에덴원에서 金人이 스스로 왔다고한다.

『화엄경(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금강산에는 법기라는 보살이 1만2천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고한다.

"

『화엄경(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감탄하기를 “아아. 우리 동방의 정토(淨土)의 사업이 대개 그윽히 합치되는 것이 있었던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화엄경에서 금강산에 상주한다고 하는 보살, 곧 법기(法起)보살)이 1만 2천 반야에 자리한 몸이 이와 같고, 달에 강물에 비치고 53개 철종(鐵鐘)의 자취가 또한 이와 같다. 금강산이 산이 이루어진 것이 장엄겁(莊嚴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과거) 성수겁(星宿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미래) 사이였으니 인간과 새와 더불어 수미산(須彌山,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은 산으로 그 둘레에 4대주가 있는데 인간은 그중 남방 염부제(남섬부주)에 산다고 함)과 같아서 무상의 깨달음의 경지가 된 것이 그 영험을 나타낸 것이다. 마땅히 그 밝은 옥이 크게 빛나도다.”라고 하였다.




이날 저녁 금인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于闐國, 중앙아시아 호탄)의 왕입니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경전과 불상을 안치할 곳을 찾았는데 산 꼭대기를 보니 1만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왔습니다.

"
bc8937 2009-02-16 20:44:46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요동을 순행하다가 금인(金人)을 보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금인에 적혀있는 이름이 휴도왕(休屠王)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흉노의 세력이 고구려 요동성 까지 뻗쳤다는 것인가...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육왕은 아육왕(阿育王). 아쇼카 왕을 말한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 불교 관련 사실을 기록한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지금의 만주 요양(遼陽)) 옆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중에 이 성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는 모습을 보고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웬 스님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멀어지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곁에 세 겹으로 쌓은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덮어놓은 것 같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니, 거친 풀이 무성하게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길 남짓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왔고, 더 파 들어가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글)가 쓰여져 있었다. 시신(侍臣)이 글을 알아보고 말하였다.

“아것은 불탑(佛塔)입니다.”

왕이 자세히 물어보니 시신이 대답하였다.

“한(漢)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휴도왕(休屠王)이라 쓰여 있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때부터 불교에 대한 믿음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다. 뒷날 불법(佛法)이 전해지자 전후 사정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그 탑의 높이를 줄이려고 하다가 본탑(本塔)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하였다는 염부제주(閻浮提州, 수미산 남족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각형의 섬 이름. 인도를 말하기도 한다)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져 있다니 괴이할 것도 없다.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3)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 때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가 수양제(隋煬帝)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이르러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텅 비고 훼뎅그레 하여 아주 쓸쓸한 데다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불상을 똑같이 그려 서울로 왔다.(모두 약함(若函, 약자함(若字函). 불경을 함에 담아 넣고, 순서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것)에 쓰여 있다) 전한(前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살펴보니, 요동성은 압록강 너머에 있고,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한다 하였다. 다만 고구려의 성왕이 어느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도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동명제는 전한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기원전 19)에 승하하였다. 그 시기라면 한나라에서도 아직 패엽(貝葉, 불경(佛經))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이 범서(梵書)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蒲圖王)이라 한 것을 보면 전한 때에도 서역문자(西域文字, 인도 문자. 산스크리트 어)를 아는 자가 있었고, 그 때문에 범서라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건대, 아육왕이 귀신들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000개를 세워 큰 돌 속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 곳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개 진신사리(眞身舍利)란 그 감응(感應)을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다.

찬(讚)한다.




아육왕의 보탑(寶塔)이 세상 곳곳마다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하니 그때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몇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 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 云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若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 屬漢幽州 高麗聖王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 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墦
싯담어 2009-02-16 21:38:28
싯담어는 한반도사투리와 흡사하다.





[참고문헌]

출처: 조용헌 · goat1356@hanmail.net


싼스크리트어는 우리 토속 사투리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學問이란 아시다시피 몇몇 아는 事實(사실)을 적당히 꿰맞추고, 상상하고,

추측하여 自己中心的으로 해석하는 것은 禁物입니다. 확실한 典據(전거)에 依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事項을 환기 시키고자 합니다.

1. 原典(원전)(漢文)에 依(의)한 上古歷史(상고역사) 通察(통찰)이 必須的으로 要請됩니다.



山海經(산해경)․資治通鑑(자치통감)․歷代神仙通鑑(역대신선통감)․太平御覽(태평어람)․三國史記(삼국사기)․三國遺事(삼국유사)

․通知(통지)․通典(통전)․25史(25사)․後漢書(후한서)․唐書(당서)․舊唐書(구당서)․新唐書(신당서)․僞書(위서)․梁書(양서)․宋書

(송서)․隋書(수서)․周書(주서)․三國志(삼국지)․魏志(위지)․竹書記(죽서기) 等等 …많은 사서에 대한 고증이 있어야 합니다.



싼스크리트어가 우리의 토속사투리인 증거를 結論만 한마디로 記述(기술)하면,



① 우리 文明 東夷族(동이족)은 燉惶(돈황)을 中心으로 한 天山, 곤륜, 백산地域, 卽(즉) 西域(서역)의 天竺疆域(천축강역)에서 發生한

1만년의 歷史이다.



② 이 上古歷史(상고역사)와 言語로 밝힌 1만년의 歷史는 일치한다.



③ 天竺(천축)은 印度(인도)가 아니다.

Sanskrit(梵語(범어))는 印度語(인도어)가 아니다.



④ 佛敎(불교)는 印度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天竺(천축)에서 發生했다.



⑤ 歷史(역사)에서 “中國”은 현재의 “중화민국” 과 구별해야 한다.

상고사 사서에서 ‘中國’은 中心된 나라 또는 중원의 여러 나라라는 뜻이다. 나라의 중앙(임금이 있는 곳)이란 朝鮮(조선)이란 뜻이다.

朝鮮은 韓半島(한반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三國과 고려․朝鮮(조선)의 歷史(역사)무대는 大陸(대륙)이었다.



⑥ 천인지, 음양 오행사상과 佛敎(불교)․道敎(도교)․儒敎(유교)는 우리 韓民族(한민족) 고유의 우주만유자연 철학사상이며, 太初(태초)

의 실담思想이다. 중화민국의 思想이 아니다.



2.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言語(토속사투리)가 실담語요.

Sanskrit의 母胎(모태:original)가 되는 말이다.

Sanskrit어는 실담語가 인도로 流入되면서 변조된 것이다.

1만년전 부터 우리는 실담語(싼스크리트어에 근간이 되는 말)를 말하고 있는 民族이었다.



3. 漢文 古典(한문 고전)에 훈민정음 28字로 表記된 ‘古語’ 는 모두가 실담語 그 自体(자체)이다.



•東國正韻(동국정운)․ 訓蒙字會(훈몽자회)․ 新增類合(신증유합)․ 光州千字文(광주천자문)․ 註解千字文(주해천자문)․ 兒解․ 능엄

경언해․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의 언해(古語)는 모두 실담語이다.



•漢字는 실담語를 음사한(이두처럼) 글이다. 卽, 실담어 개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또한 東夷族(동이족)인 우리 민족의 글이다.



•通志에 있는 鄭樵(정초)의 七音略序(칠음약서)에 記述되기를, “七音六韻(칠음육운) 起自西域(기자서역) 流入諸夏… 萃僧從而定文(췌

승종이정문)… ” 는 七音이 西域에서 夏(하)나라(BC.2224 - BC.1778) 卽, 支那大陸(지나대륙)으로 流入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4. 실담語와 Sanskrit와 우리말(토속사투리)의 관계를 알고자 한다면,

• Oxford 사전(Sanskrit English Dictionary) 20만단어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Sanskrit語, 佛經, 법화경, 금강경을 通讀해야 한다.

이 모두가 실담語이며 우리는 現在 이 실담語(토속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再確認(재확인)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 韓

民族(한민족)은 東西文明(동서문명)을 찬란한 역사를 創造한 偉大한 民族임을 밝혀 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Oxford 辭典 안에 있는 表紙의 Title를 注目 하십시오.)



“Sanskrit Language Cognate Indo-European Language” Sanskrit는 印度語(인도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도어라면 Cognate 代

身 Proto를 써야 합니다.)



5. 집현전 학자들은 새로운 글자의 창제원리를 깊이 연구하는 데에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1만년전의 실담어 이다. 실

담어로 기술된 언어는 우리 토속사투리와 일치 한다.



훈민정음은 이미 그 의미와 발음이 실담어이기 때문에 실담 글자에 의거하지 않고는 훈민정음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의의]

1. 실담어,싯담어는 훈민정음의 모체이다.

2. 싯담어는 대륙조선사의 열쇠이다.

3. 싯담어는 1만년전부터 내려왔다.

4. 싯담어는 한반도사투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싯담어는 동서양언어의 원조이다.


이 름    비밀번호   

              
번호 제목 작성자 조회수 작성일
331 이순신장군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일기 이순신 3,495 2009-03-18
330 달의 기원 달기 10,433 2009-03-18
329 [펌글]황하의 명암1:중국대륙을 적시던“뜬 강”황하(기고문) bc8937 6,451 2009-03-16
328 [펌글]1만년전 땅을 밟고 내려와 온난화의 바다에 갇히다 [1] bc8937 3,714 2009-03-16
327 [김치]의 淵源을 아십니까? bc8937 3,829 2009-03-15
326 [추천도서] 지식의 사기꾼 (뛰어난 상상력과 속임수로 거짓 신화를 창조한 사람들) 강현구 3,686 2009-03-14
325 암흑물질의 은하 보호 역할 확인 bc8937 3,597 2009-03-14
324 독도 '강치'가 돌아왔다…33년 만에 모습 드러내 [2] 매일신문 3,876 2009-03-12
323 조선의 만주영토는 이렇게 넓었었다 bc8937 4,235 2009-03-12
322 [Why]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1] 조선일보 4,040 2009-03-10
321 해동역사 지리고(海東繹史地理考) 서문(序文) 한진서(韓鎭書) 3,727 2009-03-08
320 동몽선습[童蒙先習] [2] 박세무 5,092 2009-03-08
319 이론夷論 [1] [펌]박문기 3,435 2009-03-08
318 천마총은 어디로... [1] bc8937 3,952 2009-02-26
317 고려청자는 11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 만들어 졌다 bc8937 4,001 2009-02-25
316 중국인들의 황실사관 베이징원인 3,190 2009-02-24
315 중국의 역사왜곡, 조목조목 비판의 글(저서 '해차록') 김성일 3,930 2009-02-24
314 리씨성(李氏姓)의 기원 [1] bc8937 4,521 2009-02-24
313 중국 전주지도에 나타난 완산 bc8937 4,320 2009-02-24
312 미국 L.A 버클리대학 홈페이지에 실린 한국역사 [1] bc8937 4,021 2009-02-18
금인(金人)의 나라 흉노(匈奴) [6] bc8937 3,987 2009-02-14
310 정조 비밀편지 공개 관련 뉴스들 자료실 3,509 2009-02-10
309 광대토대제비문의 염성(鹽城)에 관한 고찰 - 강소성 일대가 염성이다 자료실 4,026 2009-02-08
308 조선의 책들 부수(部數)와 리콜도 왕이 결정했다 소개 4,380 2009-02-05
307 강함찬 대장군 강함찬 4,622 2009-02-05
306 백제 수도는 공주-부여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 [1] news 3,981 2009-02-04
305 미라 관련 새소식들 bc8937 4,783 2009-02-03
304 상고사 연구’ 푹 빠진 김경종 대전지법원장 신보 3,930 2009-01-30
303 임진왜란 킬링필드 신보 5,906 2009-01-29
302 엄신의 생애와 그 대표적 공법 [2] 인물소개 10,382 200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