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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비밀편지 공개 관련 뉴스들  

정조 비밀편지 공개후 `독살설` 논란 증폭 
 
소설속 이야기 판명 VS 뒤집을 근거 안돼
자연사론자 "남인이 유포한 야담…벽파 몰락 다음에도 제기 안돼"
독살론자 "병증 호소ㆍ친밀한 내용은 노회한 군주의 통치 전략일 뿐"
 
 
 


 
정조를 다룬 드라마 `이산`. 
 
정조가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어찰(御札) 299통이 `정조 독살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증거인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이번에 발굴한 어찰들에서 정조는 병증을 여러 차례 호소하고 친밀함을 표시해 노론 벽파에 의한 피살 가능성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 정조 어찰 분석작업에 참여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조가 오랜 기간에 걸쳐 병을 이야기하고 있고, 특히 죽기 전에 증세가 심각해진다는 점을 보면 건강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독살보다는 자연사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신대 사학과 유봉학 교수도 저서 `정조대왕의 꿈`를 통해 정조 독살설이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유 교수는 정조 사후 5년 만인 1806년(순조 재위 6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인갱화`(丙寅更和)를 주목했다. 집권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 세력이 주축이 된 시파(時派)가 집권함으로써 본격적인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든 사건이 바로 병인갱화다.

유 교수는 "정조가 독살되었다면, 시파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이런 독살설보다 더 좋은 혁명 구호는 있을 수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제기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조 독살설은 조선 후기 영남 남인과 일제시대 영남지역에서 만들어진 야담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조 독살설이 널리 퍼진 데는 역사학자보다는 소설이나 역사대중서가 결정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독살설을 지지해온 학자들은 이번 어찰이 오히려 정조의 독살 가능성을 더 높인다며 반박하고 있다.

`조선 왕 독살사건` 등 역사 저작물을 통해 정조 독살설을 주장해온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번 서찰은 정조와 심환지의 정치적 입장이나 행보에 관한 문건"이라며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내세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정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죽음에 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며 "심환지가 매우 아끼는 중신이었다면 어째서 사후 대비를 부탁하지 않았겠느냐"고 밝혔다.

정조 독살설을 다룬 소설 `영원한 제국`의 저자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도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교수는 "당시 간찰은 지금의 전화에 가까운 일상적인 통신수단이었으며 어찰 속에 구어적 표현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정조와 심환지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며 "정조는 24년간 집권한 노회한 권모술수가이기도 했다. 정적에게도 친밀한 서신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손동우 기자 / 김슬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9.02.10 16:27:37 입력
 


 

이덕일 "편지공개로 정조 독살가능성 더 높아져"
강영수 기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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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10일 조선 후기 개혁군주로 꼽히는 정조가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공개되면서 ‘정조독살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에 대해 “오히려 정조의 독살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 “정조가 심환지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보면 상당히 깊은 이야기까지 오고 갔는데 왜 정조는 자기 자신이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체제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소장은 “암살이나 독살은 항상 최측근에서 믿는 사람한테 나오는 것이지 아주 반대 사람한테 나오지는 않지 않냐”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관계처럼 항상 최측근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암살기도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정조가 세상을 떠날 그날 최대 정적인 정순황후 김씨가 바로 인사를 단행해 심환지가 영의정에 등용됐고, 정조가 사망하기 얼마 전 다산 정약용에게 ‘곧 등용할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회람을 보냈다”며 “이는 정조가 자신이 죽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 정조가 사후 체제에 대해서 대비하지 않았던 점에 초점을 두고 주목을 해서 이 편지를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편지를 보면 정조가 심환지를 깊이 신임했는데 정조가 죽자마자 가장 정치적 이득을 얻은 세력은 정순황후와 심환지이며, 노론 벽파는 정조 사후 반대파인 남인들을 싹쓸이해 죽이고 귀양보냈다”며 “이런 정치적인 지형변화를 놓고 볼 때 정조가 어떤 측면에서는 심환지에게 상당히 이용당했지 않나 라는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정조와 심환지의 편지는 양자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정치적) 목적이 있어 주고 받은 것”이라며 “정조는 정조 나름대로 최대 정파인 벽파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지 않으면 정국을 효과적으로 끌고 가기 어렵겠다라는 판단에서 심환지를 끌어들인 것이고, 심환지도 상당한 친정체제를 구축한 정조를 계속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이런 공약수가 두 사람을 편지로 맺을 수 있게 해 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사도세자 문제를 놓고 심환지의 노론 벽파와 정조는 근본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전제한 뒤 “심환지가 왜 그렇게 (정조가) 편지를 태우라고 당부했음에도 태우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주목을 해야 한다”며 “노론 벽파 핵심부의 입장에서 그 편지를 가지고 정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 소장은 “우리 사회에는 어떤 한 사료가 나오면 항상 과거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확 덮었다가 시간이 다시 지나면 또 흐지부지되는 식”이라며 “이 편지들이 아주 흥미롭고 내면적인 것을 알려주는 사료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등 많은 자료 중의 하나로 판단해야지 이 하나의 자료 때문에 수십 배, 수백 배나 많은 자료가 다 틀렸다라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입력 : 2009.02.10 10:50 / 수정 : 2009.02.10 15:20


200년 만에 열린 블랙박스 … 다시 써야 할 정조 시대 역사 [중앙일보]

적대파로 알려진 노론 심환지와 밀서 교환

군왕의 ‘비밀 편지’는 아침 녘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 하루에 네 번 보낸 일도 있었다. 서찰은 은밀하게 오갔다. 관복을 입지 않은 승정원 심부름꾼은 자유롭게 궁을 출입했다. 수신자의 관직이 높아지자 남의 눈을 의식해 양반집 노복(奴僕)이 밀서(密書)를 품고 궁을 오갔다. 이렇게 전달된 임금의 편지는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4년간 299통. 임금은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열사흘 뒤 숨을 거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고위 관료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서간 299건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새롭게 발굴한 ‘정조 어찰첩(御札帖)’의 실물 일부를 공개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역사가 비켜간 ‘블랙박스’=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낸 것이라 이례적이다. 또 날짜별로 일괄 정리돼 공식 사료와 대조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다량의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물이 심환지라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조에게 가장 적대적인 당파로 알려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이는 왕조의 공식 사료인 『정조실록』 『승정원 일기』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서신에서 정조는 편지를 태우거나 찢어버리라고 계속 말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서간을 통째로 보관해 뒀다. 심환지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간직한 이 방대한 자료는 200년 뒤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역사의 ‘블랙박스’가 됐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조의 집요한 ‘서신 정치’=정조는 ‘서신 정치’를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혁파 영수였던 남인의 채제공(1720~1799)에게도 개인 서신을 다수 보냈다. 이런 비밀 편지를 통해 공식 사료에선 알 수 없었던 정치 이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먼저 노론 벽파와 심환지에 대한 재평가다. 지금까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최대 적대 세력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정조가 수년에 걸쳐 은밀하게 심환지를 통해 ‘대리인 정치’를 했을 가능성이 이번 서신에서 제기된다. 벽파는 정조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국정 파트너’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복심’을 펼치는 최측근 신료였을 거란 해석이다. 예컨대 1798년 7월 14일, 정조는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8월 28일에는 우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심환지는 궁을 떠나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며 예조판서를 그만두는 사직소를 세 차례나 올린다. 공식 사료에는 이런 인사 발령 사항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직소를 올리는 횟수와 시기까지 정조가 지시했다는 것이다. 금강산 유람도 정조의 권유였다. 심환지를 우의정으로 삼아 국정운영을 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종의 정치적 속임수를 쓴 것이다. 공식 사료에는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 있는 상소문이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 준 문구 그대로 돼 있는 경우도 있다. 국왕이 의지를 직접 펴기 곤란할 때 측근의 신하를 통해 뜻을 펼친 것이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서신만을 놓고 정조를 ‘벽파의 후견인’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곤란하다”며 “정조는 다른 당파에도 비슷한 ‘서신 정치’를 했을 것이며 이것들이 발굴돼야 종합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정조는 1800년 6월 초 등창 때문에 앓기 시작해 20여 일 만에 급서했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현대 사극이나 작가들의 단순한 추리만은 아니다. 정조 사후에 남인 측이 제기하던 의혹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는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나온 내용을 더듬어볼 때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일 가능성이 커졌다. 정조는 수년에 걸쳐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렸다.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중략)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1800년 6월 15일)고 호소한다. 국왕의 병세는 국가의 일급기밀에 해당한다.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찰을 분석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서찰이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됐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시대 재해석 필요=이번 서신 공개로 인해 그간 공식적 사료에 의한 정조 시대 해석에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의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된다. 단국대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정조의 이면’이나 당시 정치의 ‘뒷모습’을 읽고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이 발굴을 ‘엄청난 선물이자 동시에 커다란 과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300편에 이르는 정조 자신의 목소리를 공식 사료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편을 영인·탈초·번역하고 그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다음 달 중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고전번역원도 함께했다.

정조 어찰첩은 원래 심환지 가문에서 보관돼 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의 소장자는 심씨 가문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 공개를 꺼리는 이 소장자는 조만간 정조 어찰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탁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노필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정조 독살說은 野談에 기초한 것”
 
‘정조 비밀편지’ 공개로 논란 뜨거워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9일 공개됨에 따라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僻派)에 의한 ‘정조 독살설’은 일단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조가 죽기 13일 전 심환지에게 쓴 편지에 보이는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1800년 6월15일)는 내용이나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린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정조는 자연사했을 것으로 보는 게 순리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일반에 미친 정조 독살설의 뿌리는 강고하다.(문화일보 2월9일자 1·3면 참조)
지난 2001년 출간한 ‘정조대왕의 꿈’(신구문화사)에서 정조 독살설의 허구를 주장했던 유봉학(국사학) 한신대 교수는 “정조 독살설은 조선후기 영남 남인과 일제시대 영남지역에서 만들어진 야담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번 자료 발굴로 근거를 상실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나아가 정조 독살설이 일제 식민사관을 뒷바침하는 것이라며 폐기를 촉구했다.
반면 ‘영원한 제국’(1993·세계사)의 작가 이인화씨는 이번 자료 공개에도 불구하고 정조 독살설은 뒤엎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남인의 영수가 송시열의 집안에 문상을 가기도 했던 것에서 나타나듯 당시의 정치가들은 독서인이자, 교양인이었고 노회한 정치인이었다”며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 사이에 오간 편지 또한 대단히 친밀하다. 하지만 결국 남인은 송시열에서 사약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번 자료가 정조의 독살설을 뒤엎을 증거로 보이지는 않으며, 최대한 낙관적으로 해석한다해도 심환지가 연루되지 않았을 가능성 정도만 보여준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조선 왕 독살사건’(2005·다산초당) 등을 통해 정조 독살설을 주장해온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정조 서찰을 통해 정조와 심환지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를 읽을 수 있을 뿐”이라며 “이를 통해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오히려 정조가 노론 벽파내의 정치적 분열을 노리는 서찰일 수도 있다”며 “또한 서찰에 나타난 대로 정조가 진심으로 심환지를 신임해서 자신의 병세를 이야기했다면 역설적으로 심환지의 정조 독살 가능성을 강화하는 사료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0년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를 출간한 정조시대 전문가인 박광용(국사학) 가톨릭대 교수는 “정조 독살설은 바로 그 당시 남인들에게서 나왔다고 보여진다”며 “정도 독살설의 진실여부를 떠나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몰락한 남인들이 정조의 독살설을 믿었던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당시 남인들은 정조의 죽음 뒤 나타난 상황을 환국(換局·정치 주도세력이 바뀌는 사건)에 해당하는 정치적 격변으로 느꼈으며 경북 인동 지역의 장씨 집안에서는 이를 그대로 믿고 관아에 쳐들어가기까지 했다고 소개했다.
최영창·최현미기자 ycchoi@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9-02-10
 

 
정조대왕의 사망 원인은 화병, 독살?
비밀서찰의 내용으로 보는 정조의 마지막 석달
 
 
입력일 2009.02.10 16:39 ㅣ 수정일 2009.02.10 17:37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뛰어나면서도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인물인 정조대왕이 사망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병세를 자세히 기록한 비밀편지를 남긴 사실이 발견돼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 정조는 자신의 병세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그 동안 독살설에 휘말려온 그의 마지막 순간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는 1800년 4월17일자 편지에서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 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른다”고 썼다. 숨지기 두 달 열 이틀 전이다.
이어 6월15일에는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올 한 해 동안 황련을 1근 가까이 먹었다.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고 했다. 숨지기 13일 전이다.
이러한 편지 내용을 볼 때 정조는 숨지기 두세 달 전부터 몸에 열이 오르고 갈증에 시달리는 증세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가 1근 가까이나 먹었다고 말한 황련은 열을 내리기 위해 쓰는 한약재다.
공개된 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강희철 교수는 “뱃속에 화기가 올라가기만 한다는 표현을 봐서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증세일 가능성이 높다”며 “밤에 뒤척이며 잠을 잘 못 자는 것도 여러 스트레스나 불안 장애에서 오는 증세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수면장애, 고열 등의 증세가 숨지기 13일 전 상황이라는 데에 대해 강 교수는 “뱃속의 화기, 스트레스나 불안 등만으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드러나지 않은 다른 병세가 계속 악화되면서 고열과 수면장애 등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있다” 고 말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화병클리닉 정선용 교수는 정조의 증상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유년기의 충격이 ‘스트레스성 외상성 증후군’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만년에는 화병으로 발전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목과 폐가 메마른다거나 얼굴에 화기가 있다는 등의 증세로 봤을 때 스트레스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심인성 질환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조 대왕은 영조대왕의 손자이면서 할아버지의 분노로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무리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정 교수는 “연산군이 스트레스를 주색으로 풀었다면, 정조는 편지에서 볼 수 있듯 화도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면도 드러내면서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며 “그러나 만년에는 누적된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한계를 넘게 되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되거나 열이 나는 등 육체적인 증상으로 발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비밀서찰의 수신인이 그간 정조를 독살한 세력으로 지목됐던 노론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였다는 점에서, 독살설이 잘못됐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신임을 얻은 최측근이 자신을 신임한 왕을 정치적 이유로 독살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 아니냐”며 정조의 만년 증세가 몸의 열을 오르게 하는 한약 등을 정조가 지속적으로 복용하도록 한 세력의 음모에 의해 나타난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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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주둥아리를 … 호로자식” … 성군 정조 속 인간 이산을 보았다 [중앙일보]

200년 전 정조가 보낸 비밀 어찰 299편 공개

정조가 벽파 세력의 약화를 우려하며 쓴 질타와 격려의 편지. 격정적으로 글을 휘날리다가 적당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아서인지 한문 문장 속에 ‘뒤쥭박쥭(뒤죽박죽·붉은 선)’이란 한글을 섞어 넣었다. “요사이 벽파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는데 (중략)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들이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이다. 왼쪽 끝에 나오는 날짜 정사년 4월 11일(丁巳四月十一日)은 심환지의 집에서 기록한 편지 수신일이다. 1797년 4월 11일(음력)에 해당한다.

 “입에서 젖 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 “나의 지시로 좌의정이 욕을 한 사발이나 먹게 만들었으니, 쯧쯧!”

군주는 거침 없었다. 이름 높은 고관·학자들이 질펀하게 욕을 먹었다. 학문을 사랑한 성인(聖人)풍의 군주로 평가받던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 그의 이면은 달랐다. 다혈질의 임금, 격정의 군주. 그의 내면을 송두리째 쏟아놓은 비밀 서찰 299편이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 의해 공개됐다. 정조에 적대했다고 알려진 벽파(僻派)의 영수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분노가 있는가 하면 폭소도 있다. 정계 극비 사항을 전하며 긴장을 풀기 위해 “껄껄(呵呵)” 거리기도 했고, 신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배를 잡고 웃었다(聞來令人捧腹)”며 덮어주기도 한다.

200여 년 전에 부친 왕의 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18세기 ‘성인 군주’를 잃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인간 이산(李祘·정조의 이름)은 얻는다. 인간의 이름으로 역사가 새로 쓰인다.

배노필 기자
 

 
직설적·다혈질… 호된 질책·따뜻한 위로 교차 
 
정조는 학식이 높고, 성품이 온화한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밀편지에는 흥분을 잘하고, 거친 언사를 쓰는 직설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인간적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호로자식·젖비린내… 거친 표현 많아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1757~1824년)에 대해서는 “호로자식”이라고 혹평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조도 자신의 성품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797년 11월24일 아침에 보낸 편지에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썼다. 국정 전반에 대한 불만도 수시로 토로했다. “나는 시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을 치솟게 만들 뿐이다. ”
●“찢든지 세초하라” 꼼꼼함 엿보여
뛰어난 문장가이자 문필가인 정조는 비밀편지에선 일상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속담, 비속어도 자주 썼다.
1797년 4월11일에 보낸 편지 한 구절에는 ‘뒤쥭박쥭(뒤죽박죽)’이란 한글이 등장한다. 수차례에 걸쳐 철저한 비밀유지를 당부하는 대목에선 의외로 꼼꼼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든지 하라.”고 당부했다.
 편지는 주로 정치와 국정운영에 관한 정보와 의견들로 채워졌으나 단순한 안부와 정담을 나누는 내용도 일부 있다. 1799년 10월1일에 보낸 편지는 ‘300장(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는데.”라며 심환지의 아들을 과거시험에 붙이지 못해 아쉬워하며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찰첩의 종이와 형식도 당대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듬이질하여 반들반들하게 만든 고급 종이가 대부분이지만 저급으로 취급되는 피지(皮紙)도 사용된 점은 정조의 검소한 생활태도를 엿보게 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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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벽파와 시파로 재편된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하다고 주장한 반면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가 즉위한 뒤 벽파는 왕실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심환지(1730~1802년)는 철저한 노론계 인물로 벽파의 영수였다. 따라서 ‘정조 독살설’이 나돌 때면 그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독살을 방관한 인물로 치부하곤 했다. 그런 만큼 정조 치하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고는 하나 정조와 하루에도 몇차례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정 현안을 일일이 조율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정조는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자기 뜻대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환지는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신유박해를 일으켜 시파를 탄압했다.
( 2009년 02월 10일 19시 11분   조회:3504  추천: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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