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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西遼)의 위치  
노성매


고려사 연구에 필수인 서요사(西遼史)

 

1216년(고종3년) 윤7월 몽고군에게 쫓긴 서요의 잔당들이 고려 경내를 침범했다.

1218년 몽고군 3만이 그들을 추격하여 고려로 들어왔다.

고려와 몽고의 합동 군사작전이 펼쳐졌다.

1219년(고종6년) 正月 강동성(江東城)에서 그들을 섬멸하다.

 

►마무리

몽고군 인솔 장수 합진(哈眞)이 말하다.

만 리를 달려와 고려와 힘을 합쳐 적들을 소탕했으니, 千年의 요행으로 생각한다.

고려국왕을 직접 배알하고 예를 갖추어야하나,

몽고군의 숫자가 많고 (도성까지) 멀리 가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므로 다만 사자를 보내 사의를 표할 뿐이다.

哈眞曰,我等,來自萬里,與貴國,合力破賊,千載之幸也,禮當往拜國王,吾軍頗衆,難於遠行,但遣使陳謝耳,

그리고 김취려(金就礪) 장군을 형님으로 받들어 동쪽에 앉게 하고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절요

 

 

서요(西遼)의 위치는 그 견해가 양분됨을 볼 수 있다.

 

요(遼)가 여진(女眞)에게 멸망하기 직전, 요의 황족이던 야율대석[耶律大石, Yeh-lü Ta-shih, 재위 1124-1143]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초원 지역으로 도망하여

오늘날 추구착(Chuguchak) 근처의 타르바가타이(Tarvagatai)에 있는 이밀(Imil)에 근거를 두고, 돌궐계 국가인 카라한조(Karakhanid dynasty)의 도읍인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카라 기타이(Kara Kitay, 西遼)라 불리는 새로운 제국을 수립했으며,

구르 칸[Gur Khan -'사해(四海)의 군주'라는 의미]이라는 왕명을 사용하였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미국 역사학자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 발췌

 

►142쪽~

상당수의 거란인이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지휘하에 사막과 스텦을 통과하는 긴 이동을 단행하여 트란속시아나(Transoxiana)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거란제국, 즉 카라키타이(Qaraqitai)를 건설했으니, 그것이 곧 중국사에서 <西遼>로 불리는 나라이다.

 

 

서요의 중심지가 발하시호 일대와, 트란속시아나 지방이라는 설로 양분되고 있다.

서요(西遼)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수도가 키르기스스탄 토크모크의 부근이었다고 하고

두산백과에서는 서요가 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셀주크 제후(諸侯)의 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서 투르키스탄의 전역이 서요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래 지도는 유목민족제국사에 언급된 아무다리야 강과 사르다르야 강 사이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에 정착했던 서요(西遼)의 중심위치이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이때 西遼의 수도는 사마르칸드일 가능성이 크다.

 

 

 

어디에도 사마르칸드가 西遼의 수도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곳은 없다.

그러나 서요가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 살쥭제국은 그 일대로부터 패배하여 서남쪽으로 물러난 상태였으며,

살쥭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콰레즘[샤왕조] 역시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콰레즘의 오랜 수도는 우르겐츠[우르겐치]였다.

 

사마르칸드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단단한 요새였으며,

수도로도 가장 적합한 곳이었고,

또한 물자와 자원이 풍부하여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수도로 자리잡혀온 곳이다.

11세기에 이슬람의 샤왕조가 사마르칸드를 탈취해서 이슬람의 성지로 만들었고 수도로 사용했었지만,

12세기 후반에 몽고군대에게 다시 점령당하면서, 이슬람의 샤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출처/두산백과

 

위의 기록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샤왕조가 11세기부터 몽고군에게 점령당하기까지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사용한 듯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서요의 몰락기에 이를 때까지 샤왕조의 수도는 우르겐츠였다.

당시의 중앙아시아 판도를 󰡔유목민족제국사󰡕에서 발췌해본다.

 

►116쪽~

1137년경 카라키타이는 이미 코잔드[Khojand:시르다르야 강 유역, 사마르칸드가 위치한 지방, 현 소련의 우즈벡공화국] 지방에 이르는 시르다르야 강 유역을 거의 전부 지배하였고, 사마르칸드에 내분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여, 트란속시아나의 잔여 지방에도 침입하였다….

 

(살쥭제국의) 산자르는 카라키타이가 사마르칸드로 진군함을 전쟁 개시의 이유로 삼아, 출동하여 1141년 사마르칸드의 동쪽 카트빈(Qatvin) 초원의 유슈르사나(Ushrsana) 근처에서 살쥭 군사와 카라키타이 군사들은 대회전(大會戰)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살쥭군은 치욕적으로 완전 패배하였다.

그 결과 옥쿠스강[아무다리야 강] 건너편의 전체 영토는 살쥭 통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나갔다.

 

그보다도 더욱 중대한 결과는,

살쥭제국의 세력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현실을 그 지역에 존재하던 다른 부족들,

특히 콰레즘의 부족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

 

►117쪽∼

이슬람 사료에 ‘구르·칸 gur-khan’으로 불린 카라키타이 지배자들은

이미 점령한 지역 이상으로 영토를 확장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2세기의 마지막 4분기 중에 그들은 콰레즘과 충돌하게 되었다.

 

콰레즘이 카라키타이의 문제에 간섭이 용이할 수 있었던 것은

카라키타이 내부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라키타이의 정치, 특히 재정행정은 점차로 억압적으로 되어, 그에 반발하는 소규모 반란들이 자주 발생하였고,

더욱이 구르·칸의 위치를 둘러싼 왕실내의 치열한 분쟁 때문에,

각각 상당 기간 동안 실시되었던 수차에 걸친 여성에 의한 섭정으로,

제국의 핵심을 형성하였던 세력자체가 약화되었다.

 

13세기 초에 카라키타이의 동부국경에 칭기즈칸에 패퇴하여 밀려오는 나이만 Naiman이 등장하였다.

구르·칸은 나이만족을 퇴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카라키타이 국내에 무슬림(Muslim 이슬람교도) 반란이 발생하여 실패하였다.

 

나이만의 추장 쿠츨룩은 카라키타이군을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왕조까지 멸망시켰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콰레즘·샤(Qwarezm-shah)도 카라키타이 영토의 큰 부분을 점유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점령성공은 1212년 사마르칸드의 大血戰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콰레즘은 쿠라싼의 북쪽, 옥쿠스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있었다.

그 중심지는 10세기부터 발전된 구르간즈(Gurganj)市이었으며,

그 지역은 처음에는 카트의 아후리기드(the Afrigids of Kath),

995년 이후에는 마무니드(Ma'munid:995∼1017년) 왕조 등 토착 이란인이 오랫동안 통치 지배하여온 곳이었다.

 

그 시대부터 그 지역의 지배자를 콰레즘샤(Qwarezmshah)라고 불렀다.

 

그 당시 그 지역에는 고도로 문화가 발전되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튀르크(突厥)와 蒙古의 연이은 침략으로 파괴되어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1017년에 그 전체지역은 가즈나비드의 통치하에 들어가,

1041년 오구즈(Oghuzz)가 그곳을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살쥭이 오구즈를 물리치고 그 지역을 12세기 초까지,

즉 살쥭세력이 쇠퇴할 때까지 지배하였다.

콰레즘 지역을 통치한 살쥭의 행정은

살쥭의 속국이었던 突厥系 아누쉬·테긴(Anush-tegin) 왕조가 담당하고 있었다.

 

콰레즘 통치관들은 알라 알·딘 앝씨즈('Ala al-Din Atsiz:1127∼1156년) 행정부 시대로부터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알씨즈는 大콰레즘 帝國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는 행정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변경지방을 안정시키며,

아랄 해와 카스피 해 중간의 스텝지대에 거주하는 非이슬람 突厥部族들의 침범행위를 방비하였기 때문에 ‘가지ghaz’, 즉 ‘믿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살쥭朝 연대:1038∼1194년

콰레즘샤朝 연대:1077∼1231년

 

또한 마퀴쉴락 Maqishlaq 반도의 지배권을 확인하고,

킾착Qipcaq 스텝에 콰레즘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앝씨즈는 산자르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까지 살쥭 제국의 세력은 그가 전복시키기에 너무 강대하였다.

 

결국 앝씨즈는 살쥭의 신하로서 생애를 끝마쳤지만, 콰레즘국의 독립의 기초는 그에 의해 놓여졌던 것이다.

앝씨즈가 사망한 후 그의 계승자 일·아르슬란 Il-Arslan(1156-1172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콰레즘은 카라키타이의 속국이 되었다.

일·아르슬란은 구르·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다가 카라키타이와의 한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그 전쟁은 콰레즘이 쇠약해진 카라키타이朝에 조공을 바치는 일을 기피하였기 때문에 발발된 것이었다.

 

그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알라 알·딘 테키쉬 'Ala al-Din Tekish(1172-1200년)대에 콰레즘은 결국 독립하였다.

테키쉬는 구리드를 몰아내고 쿠라싼 전체에 대한 콰레즘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이란 지역의 통치권에 대한 협상에도 성공하였다.

테키쉬가 군주의 位에 오르기까지 그의 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카라키타이의 조력에 의존한바 적지 않았으나, 그는 聖戰(jihad)의 깃발을 카라키타이에 대하여 들었다.

 

13세기로 전환할 즈음에는 비록 원한을 사고는 있었으나,

콰레즘의 세력은 전체 트란속시아나에 확고히 구축되어 있었다.

 

테키쉬는 그의 아들 쿠틉 알·딘 무함마드 Qutb al-Din Muhammad(1200-1220년)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그 시기가 콰레즘 제국 번영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쿠틉이 位에 오른 후 곧,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는 蒙古 세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

그의 부주의한 정책 때문에 칭기즈칸이 대대적인 복수의 전쟁을 일으키도록 자극했으며, 그 결과 1220년 콰레즘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콰레즘의 멸망으로 蒙古族들에게는 당시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이란세계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의 중앙아시아 판도

 

 

위 지도는 네이버에 올려진 콰레즘과 서요의 강역이다.

수도를 토크모크 남서쪽에 있는 발라사군으로 하여, 발하시호 일대를 서요(西遼)의 강역으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룩 콴텐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제국 판도[콰레즘·살쥭제국·西遼] 정리해보면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인 西遼 몰락기의 강역인 듯하다.

 

콰레즘이 우랄호 남쪽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콰레즘의 무함마드는 쿠츨루크와 손을 잡고 서요의 야율직노고를 몰아내게 된다.

 

유목민족제국사를 살펴보면, 콰레즘과 쿠츨루크가 연합하여 야율직노고를 몰아내고 난 뒤, 두 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콰레즘은 트란속시아나와 사마르칸드 일대의 땅을 획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족제국사 117쪽

나이만의 추장 쿠츨룩은 카라키타이군을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왕조까지 멸망시켰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콰레즘샤도 카라키타이 영토의 큰 부분을 점유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점령성공은 1212년 사마르칸드의 대혈전(大血戰)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야율직노고가 쿠츨루크에게 패한 것은 1211년,

콰레즘과 쿠츨루크 사이의 영토전쟁은 1212년,

쿠츨루크에 의한 서요(西遼)의 몰락은 1218년 된다.

 

콰레즘과의 영토전쟁에서 패배한 쿠츨루크는 사마르칸드로부터 철수하여 발라시군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서요(西遼)의 고려 침입에 대한 고려사절요의 첫 기록은 고종 3년(1216) 윤7월이다. 서요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한 구실로 고려에 몽고군이 들어온 것은 1218년.

 

콰레즘국이 몽고사신을 죽인 시점은 1218년 이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사건 발생의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함],

이때 칭기즈칸은 콰레즘국 정벌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고,

서요는 그 길목에 있었다.

 

1216년에 고려로 들어온 금산ㆍ금시왕자를 주축으로 한 서요의 잔당은 쿠츨루크에게 몰락당한 야율직노고의 후손들로 보인다.

그들은 금산·금시 왕자를 주축으로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대거 망명길에 올랐다.

고려에 침입한 서요의 무리를 보면, 가축과 부녀자에 어린이까지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거란의 터전을 찾아 고려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길고 고달픈 여정.

그들의 왼쪽으로는 콰레즘이 버티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쿠츨루크와 칭기즈칸이 있었다.

 

 

 

칭기즈칸과 쿠츨루크의 추격을 피하여,

페르가나를 지나 시르다르야 강 상류, 그리고 나만 강 줄기를 따라 천산산맥의 협곡을 지나 東으로 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2019년 04월 10일 12시 20분   조회: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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