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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진실의 경계 ①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노성매


사건의 전개과정으로 인해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삽혈로 되짚어보는, 부여융과 취리산 회맹」에 앞서 올립니다.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당(唐) 13만, 신라 5만 대군이다.

당의 백제공격에 대한 교과서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당(唐) 13만

 

연월일

행보

 660년 3월

   내주(萊州) 출발.

      〃 6월 21일

   덕물도 도착.

      〃 7월 12일

   나당(羅唐) 18만 소부리벌 집결.

      〃 7월 13일

   사비도성 공격. 함락.

   의자왕 웅진성으로 탈출.

      〃 7월 18일

   의자왕 항복.

      〃 8월 2일

   항복의례.

      〃 9월 3일

   소정방 귀국.

   백제왕과 왕족 및 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 명

   포로로 동행.

   당은 백제 땅에 5도독부 설치.




우리나라 역사에는 백제멸망을 660년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이것은 백제의 멸망이 아니라,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소정방은 8월 26일 임존성 공격에 실패했다.

5~6일간의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사가(史家)들은 추론한다.



임존성을 중심으로 백제 서부의 2백여 성이 백제를 위해 일어섰다.[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


그럼에도 9월 3일 소정방은 유인원, 유인궤 등 1만의 당군을 백제에 잔류시킨 채,

의자왕 등의 포로를 이끌고 서둘러 당으로 귀국했다.


그 이후 백제군의 활약상이다.



   

연월일

행보

 660년 8월 26일

  소정방 임존성 공격, 실패.

  임존성의 흑치상지에게로 백제의 2백여 성 호응.

      〃 9월  3일

  소정방 귀국.

  유인원 등 1만 병력이 웅진성과 사비성에 잔류.

     〃 9월 23일

  백제군의 사비도성에 대한 첫 공격.

  도성 인근 20여 성 호응.[신라본기 태종무열왕7년]


  당군은 사방의 길목이 차단당해 성밖으로 출입조차

  불가능. 군량조달에 큰 어려움.

  [신라본기 문무왕11년조 답신]


  당군은 신라에 구원요청.

    〃 10월 9일

  신라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

  백제군 신라에 패배.

 661년 2월경

  백제군의 강동지역 확보와 사비성 공격.

  당군의 신라에 대한 원군요청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熊津請兵 日夕相繼’

     〃 3~4월

  두량윤성 전투.

  위기에 빠진 당군을 구원하기 위한 신라 대 백제전.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

  신라 대패.

  당군은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에 모여 배수진.

  군량수송로 완전 봉쇄당함.

  소금과 간장까지 모두 떨어졌다.

  신라군이 샛길을 이용해 당군에게 식량조달.

  1만 당병(唐兵)은 4년 동안

  신라 때문에 입고 먹을 수 있었다.

  몸은 비록 당에서 태어났으나,

  생명은 신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

  ‘一萬漢兵 四年衣食新羅

  仁願已下兵士已上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

  [신라본기 문무왕 하11년조 답서]

 661년 9월경

  부여풍이 왜에서 귀국. 백제 풍왕으로 옹립.



당 고종은 백제에 주둔해있는 당군 1만이 절체절명에 처해 있음에도 어떠한 구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661년 6월 고구려에 대한 공격령을 발동했다.

660년 9월 2일 당으로 되돌아간 소정방은 661년 6월 고구려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소정방군은 662년 2월 회군했다.


당 고종은 그때서야 백제의 잔여병력에 대한 철수를 명했다.


당이 백제 땅에 설치했다는 5도독부는 고사하고

‘하나의 성을 외로이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신라로 가서 문무왕 김법민이 받아주거든 그곳에 의탁하고

받아주지 않거든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구당서 권84 열전 유인궤전]

高宗敕書與仁軌曰 平壤軍回 一城不可獨固

宜拔就新羅 共其屯守 若金法敏藉卿等留鎮 宜且停彼 若其不須 即宜泛海還也


이것이 당시 백제에 남아있던 당군(唐軍)의 비참한 실상이었다.



그러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고

호(戶) 24만, 인구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여 이(夷:백제)의 습속을 모두 변화시켰다.

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縣戶卄四萬」

口六百卄萬各齊編戶咸變夷風


현경 5년(660년) 8월 15일에 세우다.

顯慶五年歲在 庚申八月 己巳朔十五日癸未建



660년 8월 2일 소정방이 의자왕의 항복의례를 받고

불과 보름도 되기 전에 백제 전역의 호적정리를 마치고, 비문(碑文)까지 작성했다는 대당평백제국비명.


현대에 수천 명이 컴퓨터로 달려들어도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때 세운 것이 아니라는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후 반년도 되지 않아 사비성을 탈환한 백제군이

그 비명(碑銘)을 그냥 두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 2016년 08월 15일 02시 09분   조회:920  추천: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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