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자료실 > 학회자료
마의산(麻衣山)과 산유화(山有花)의 유래   
관리자

마의산(麻衣山)과 산유화(山有花)의 유래

 

 의자왕 20년(660 BC.) 백제가 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한반도 서해쪽에서 지금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지역으로 피난하여 몰려오게되었다. 현재 이들 지역에 남아 있는 성터나 절터 묘지 등은 거의 대부분 대륙백제의 유민들이 세운 것인데 모두 임진년(1592) 왜적들에게 침탈 당한 후 버려지게되었던 것이다.

백제 왕릉은 한반도 한국 땅에 한 곳도 없다. 고구려도 또한 마찬가지다. 신라는 망한 시기가 늦으므로 당나라 말기에 신라 유민들이 왕릉을 살짝 몇 구를 파서 한국 땅 경주(慶州)에 비석도 없이 몰래 이장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서안의 서쪽인 함안(咸安)과 본시 경주였던 순화(淳化) 지방에는 묘지가 모두 폐묘(廢墓)가 되었다고 한다. 과거 상고사학회 회원이던  김종윤선생이 현장을 직접 답사하였고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옛날 당나라 말기에 누군가 묘지를 몽땅 파서 가져갔다고 했다. 때문에 지금은 쓸모없는 폐묘(廢墓)들 뿐이라고하였다.

그렇다,  신라는 대륙에서 망하여 그 유민들이 조상들의 묘를 통째로 파서 한국 땅 경주(慶州)로 안전하게 옮겼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의 북쪽에 있어서 육로로 모든 물자의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주(慶州)는 원래 신라 당대에는 없었던 지명(地名)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경순왕을 혼인 시키면서 이제 더 이상 국사를 돌보지 말고 평생동안 편안하게 살으라고 제후에게 내리는 식읍으로 주었던 땅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을 가리킨다.

지금 경상도에 있는 경주는 고려초에 대륙의 순화(淳化)에서 살던 귀족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나라가 망하자 곳곳으로 뿔뿔히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신라의 유민들은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큰 고난은 없었을 것이므로 경상도 땅으로 이주해온 신라의 귀족들은 무난히 본토 사람들과 화해하였거나 아니면 선진화 된 무력으로 제압하였을 것이다. 그런 후에 지금 남아 있는 경주의 유적들이 세워지게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주와 대구, 가야 등의 유적들에서 흉노식 특징이 많이 보이는 것은 대륙신라의 유민들과 고구려, 흉노 등 북방민족의 후손들이 함께 썪여 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태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지금 대륙의 호남성 강화에 있었던 개골산(皆骨山)으로 떠난다.(금강산 아님) 태자는 기암(奇巖이란 기이한 바위가 있는 곳)이 있는 곳에서 절벽과 바위를 지붕 삼아 풀잎으로 밥을 먹고 삼베옷을 입으며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한다.

삼베 옷 이란 마의(麻衣)다.  마의(麻衣)란 삼베 옷이지만 나라가 망하여 죄인이란 뜻도 있으며 한이 서린 죄인이기에 좋은 옷도 아닌 삼베 옷을 입었다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란 별칭이 붙은 것이다. 그러기에 나라가 망하여 한 서린 옷이 마의(麻衣)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마의산(麻衣山)이다.

현재는 마의산(麻衣山)을 마니산(摩尼山). 마리산(摩利山)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한 많은 슬픔이 긴 세월 속에서 잊혀졌던 탓 일 것이다.

강화도는 대륙을 바라보는 곳에서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대륙에 있던 고토와 선조 그리고 천지신명께 나라를 잃은 설음을 달래주는 한이 서린 곳이기에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의산(麻衣山)을 찾았고 백제의 유민들이 대륙에서 건너와 그 한을 달래기 위해 마의산(麻衣山)에 제단을 쌓고 선조들의 넋을 달래는 한 서린 통곡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판문점의 임진각에서 처럼 대륙을 바라보고 선조들의 고향을 향해 절하고 한을 달래는 곳이 마의산(麻衣山) 임을 알아야한다.

한이 많으면 설움도 많은 것인데 이름까지 망할 넘의 마의산(麻衣山)이라 백제의 유민,  신라의 유민 할 것 없이 모두 이곳에 와서 통곡을 하게 되어 통곡의 산이 되었는데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으므로 임진년 왜놈과의 대격전이 발발하고 폐허가 된 후에 서서히 잊혀졌던 것이다. 그 대신에 지방사람들은 머리라는 뜻의 마리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 안타까운 세월 속에서 생겨난 시운이 아니겠는가?

율곤 이중재회장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게하는 것이 백제의 유민들이 남긴 산유화가(山有花歌)라는 것이다.

백제가 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한반도로 몰려와 다시는 전란을 격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산성도 쌓고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살아가려고했던 것이 오늘 날에 찌꺼기 처럼 남아있는 성터들이고 그 때 생긴 노래가 산유화가(山有花歌)라고 한다.

하지만 정식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없고 단지, 서해안 일대에 촌로들의 구전이나 농요로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부여 사람인 박흥남씨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궁야평 너른 들에/ 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吳楚) 동남(東南)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遠浦歸帆)이 이 아니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 구룡포(九龍浦)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와 벗님/ 구국충성 다 못했네//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이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륙일은/ 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 고기 잡는 어옹덜아/ 온갖 고기 다 잡어두/  경치 일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에-헤-에여루 사-사-뒤-요-  "

 

( 2013년 12월 22일 19시 05분   조회:530 )   
  
169 지명• 만년현(萬年縣)   율곤학회 2015/09/25 286
168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정의   관리자 2013/12/22 600
167 kbs - 이것이 인생이다 / 책속에서 찾은 희망   관리자 2013/12/22 537
166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뜻   관리자 2013/12/22 875
165 갑골문자   관리자 2013/12/22 615
164 사요취선   관리자 2013/12/22 982
163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起源)은 간지(干支)   관리자 2013/12/22 658
마의산(麻衣山)과 산유화(山有花)의 유래   관리자 2013/12/22 530
161 연등불(燃燈佛)의 수기(授記)   관리자 2013/12/22 495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