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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 九尺長身 故國川王은 善政을 하다  
律坤

 


  高句麗 戰亂史 / 九尺長身 故國川王은 善政을 하다

 


   故國川王은 新大王 백고(伯固)의 둘째아들이다. 혹은 이름을 국양(國襄)이라고도 한다고 되어있다. 新大王의 長子인 발기(拔奇)는 불초하여 모든 臣下들이 이이모(伊夷謨)를 王으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故國川王이다.

 

  형인 발기(拔奇)는 王位에 오르지 못한 원한으로 소노가(消奴加)의 각 장수들과 함께 일반 백성 3만여(三萬餘) 가구를 데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한 후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가에 거주하고 살았다.

 

 

 

 

  6년 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군사를 이끌고 치므로 王은 王子 계수(罽須)를 보내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王이 친히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漢나라 군사와 더불어 좌원(坐原)에서 싸워 무너뜨리고 적군의 머리를 참수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고 적고 있다.

 

  12년 가을 9월에는 경도(京都)에 6자(六尺:180㎝)의 눈이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의 패자(沛者:점잖은 자)인 비류(畀留)와 평자(評者:헤아릴 줄 아는 자)인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자제들도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여 남의 女子와 남의 집과 밭을 마구 약탈하므로 백성들은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죽이려고 하니 좌가려 등이 연나와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였다.

 

  13년 여름 4월이었다. 좌가려(左可慮) 등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왕도(王都)를 공격하였다. 왕은 기내(畿內:경기 내. 즉 西安지방)의 병마를 징발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드디어 영을 내려 근자에 관직은 모두 사정으로 제수되고 위(位:군신의 지위)는 덕으로도 승진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한 해독이 백성에게 흘러 王家를 흔들게 하였으므로 이는 나의 밝지 못한 소치이다. 너의 사부(四部:4개의 부처)는 각각 어진 자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四部에서는 모두 東部에 있는 안류(晏留)라는 사람을 천거하였다. 왕은 그를 불러들여 국정을 위촉하니 안류가 王에게 아뢰기를, 소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큰 정사에 참여할 자격이 못됩니다. 고로 서압록곡(西鴨綠谷)에 있는 좌물촌(左勿村) 사람인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인 을소(乙素)의 손자로 성질이 꿋꿋하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이 알아주지 아니하므로 농사에 전력하여 넉넉히 살고 있으니, 大王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 아니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언사와 정중한 예로 맞아들여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제수하고 우태(于台)의 관직을 주었다. 이때 을파소(乙巴素)가 이르기를, 내가 외람되게 先王의 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들의 위에 처하였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짧아 사리에 밝지 못합니다, 라고 했다.

 

  이때 왕이 말하기를,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밝음을 숨기고 초야에 오래도록 묻혀 있었으니 이제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선뜻 와주니 나의 기쁨만이 아니라 사직과 민생의 복이외다. 청컨대 편안한 가르침을 받으려 하오니 공은 아무쪼록 마음을 다해 주시오, 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비록 나라에 몸을 허할 생각은 있었으나 自己가 받은 직책이 국사를 처리해 나갈 자리는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내 대답하기를, 신같이 둔한 재주로는 감히 엄명을 당할 수 없사오니 원하옵건대 大王께서 현명한 사람을 가려 고관으로 제수하여 큰 업적을 이루게 하소서, 하였다.

 

  王은 그 뜻을 짐작하고 드디어 國相으로 제수하여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에 조신(朝臣:조정의 신하)과 국척(國戚:나라의 친척)들이 을파소(乙巴素)가 진정으로 옛 臣下의 틈을 낸다하여 미워하니, 王은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멸족의 죄를 물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을파소는 잠깐 물러나 사람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때를 못 만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일상적인 도리이다. 지금 위에서 나를 후의(厚意:두터운 뜻)로 대접하시는데 어찌 전일에 숨어살던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교(政敎:다스림을 가르침)를 밝히고 상과 벌을 삼가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팎으로 일이 없었다.

 

  그해 겨울 10월 왕이 안류(晏留)에게 말하기를, 만약 그대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만나 함께 정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업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라고 하면서 드디어 대사자(大使者)를 제수하였다.

 


  논하여 말한다면 옛날 명철한 임금은 어진 이에 대하여 올려 세우되 어떤 의혹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은(殷)나라 고종무정(高宗武丁.BC.1324~1325년) 때 부설(傅說)과 촉(蜀.AD.221~263년)나라 때 선주(先主), 그리고 공명(孔明), 또한 진(秦.BC.221~207년) 부견(符堅)과 왕맹(王猛) 등 이들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현인들이 뒤에 있어 능한 자가 직에 있어 정사(政事)가 잘 되고 교화가 밝아져 나라가 보존되는 것이다.

 

지금 王이 홀로 결단을 내려 바닷가에 있는 을파소를 등용하여 뭇 사람의 구설에 동요치 않고 백관의 위에 두었으며 또한 그를 추천한 자에게 상을 주었으니 선왕(先王)의 법을 체득했다 할 수 있다.

 


  16년 겨울 10월이 되었다. 王이 질양(質陽)으로 사냥 가다가 도중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고 무슨 일로 우느냐고 물었다. 그 자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가난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미를 봉양해오던 중 금년에는 흉년으로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양식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王은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극단에 놓이게 하였으니 나의 허물이다, 하면서 의식(衣食)을 주어 위로하고 이내 안팎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환(患:병)과 고독과 노병(老病:늙어 병듦), 그리고 궁핍으로 인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를 널리 조사하여 구호케 하였다. 또한 소속관원에게 명하여 봄 3월에서 가을 7월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식구 많고 적음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꿔주고 겨울 10월에 환납하게 하여 일정한 법을 시행케 하므로 안팎으로 크게 기뻐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국천왕은 9척(九尺)이나 되는 신장에도 불구하고 작은 일과 인재를 구하여 등용하는 일, 그리고 한 사람이 노모(老母)를 봉양하려는데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듣고 요순(堯舜)과 같은 선정(善政:착한 정사)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어진 성품과 나라 백성을 생각하는 구국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古代에는 王이 특권을 가진 시대이며 군주(君主)를 접할 수 없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언로(言路:말의 길)를 열어 을파소(乙巴素) 같은 현인을 등용하여 그때 사회에서도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군(聖君)의 자질이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물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을파소를 신하의 말만 듣고 등용시킨다는 것은 요즘 현대사회에서조차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걸핏하면 코드가 맞는 사람을 등용하고 학벌만 따지고 지연을 따지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 9대인 고국천왕처럼 훌륭한 자질을 가진 聖君의 출현이 아쉬운 때이다. 설혹 이 땅에 있다손치더라도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한국의 현실은 답답하고 암담하기만 하다. 고로 필자는 하루 빨리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한民族의 歷史와 先祖들의 업을 본받아 국가와 민족 그리고 祖國의 富强함을 일깨워 주고 싶을 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연과 학벌 등 케케묵은 낡은 생각을 버리고 전국 방방곡곡 현자와 도학자(道學者) 그리고 인재를 발굴하고 등용하는 길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2014년 04월 11일 19시 37분   조회: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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