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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王子好童의 自殺   
律坤

 

高句麗 戰亂史/王子好童의 自殺 

 

 

  高句麗 3代 大武神王 15년 봄 3월이었다. 大臣의 직위에 있던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서인(庶人)으로 삼고 내쫓았다.

 

본래 세 사람은 비류(沸流) 나라의 부장이었다. 위 세 사람은 탐심이 많고 야비하여 남의 부인과 첩 그리고 소와 말, 재물을  마구 빼앗아 자기의 욕망을 채웠다. 만약 주지 않거나 내놓지 않으면 즉시 잡아다 매를 때리거나 했다. 매 맞은 사람은 간혹 죽기도 했다.

 

  王은 이러한 소문을 듣고 죽이려하다가 先王이었던 東明의 옛 신하임을 생각해 차마 극형을 가하지 못하고 내쫓는 것으로 했다. 그 대신 남부사자(南部使者)인 추발소(鄒㪍素)를 대리로 부장(部長)으로 삼게 하였다. 발소(㪍素)를 큰 방을 별도로 마련하여 있게 하고 더한 중책을 맡기기로 했다. 구도(仇都) 등의 죄인에 대하여는 따로 명목을 붙여 당(堂:집)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자 구도(仇都) 등은 앞에 나와 말하기를, 나는 소인인지라 王의 법을 범했으므로 참아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하옵건대 공께서 저희들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다시 새로운 삶의 정신을 갖게 해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추발소(鄒㪍素) 部長은 구도(仇都)를 끌어올려 자리를 같이 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과오가 없을 수 있습니까. 지난 과오를 씻고 고친다면 크게 착해질 것이요, 라고 하면서 곧 벗이 되었다. 구도(仇都) 등은 너무나 감격하여 그후로는 악한 일을 다시 하지 아니했다.

 

  王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발소(㪍素)는 권위와 위엄으로 죄인인 구도(仇都) 등을 대하지 않고 지혜로움으로 악한 것을 징계했으므로 가히 훌륭한 관리라고 칭찬하고 대실씨(大室氏)라는 姓을 하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15년 여름 4월 王子인 호동(好童)은 옥저(沃沮)에 놀러갔다. 때마침 낙랑왕(樂浪王)인 최리(崔理)가 출행하여 호동왕자를 첫눈에 보고 묻기를, 군(君)의 얼굴기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다. 혹시 북쪽나라의 神王의 아들이 아니오, 라고 했다.

 

  그리하여 함께 돌아와 樂浪王은 公主를 好童의 妻로 삼게 하였다. 그후 好童은 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몰래 사람을 시켜 樂浪王 최리(崔理)의 딸에게 찾아가 말하기를, 만약 公主께서 그대의 나라에 있는 무기창고로 들어가 고각(鼓角:북의 모서리)을 파기한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본래 樂浪에 있는 북은 적이 있을 때나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었다. 그러므로 王子好童은 樂浪公主에게 북을 부수도록 명령한 것이다. 公主는 예리한 칼을 갖고 살짝 무기창고로 들어가 북 바닥과 모서리의 입구를 잘라버렸다.

 

  이 보고를 접해 들은 好童은 왕에게 권하여 樂浪을 습격했다. 이때 樂浪王 최리(崔理)는 북이 울리지 않고 방비를 미처 못하고 있을 때 군사가 들이닥쳐 城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樂浪王은 늦게나 북이 파괴된 것을 알고 드디어 公主를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혹은 말들을 하기로는 好童이 욕심을 품고 樂浪의 公主에게 청혼하여 결혼한 뒤 처를 뒤에 本國으로 돌아가 자명고(自鳴鼓:스스로 울리는 북)를 부수어 버리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15년 겨울 11월 王子好童은 자살하였다. 호동왕자의 둘째 부인은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의 소생이었다.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워 王이 매우 사랑하였다. 고로 이름을 好童이라 했는데, 원비(元妃:본처)가 보건대 혹 적자인 太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몹시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王에게 간하기를 好童이 나를 첩이라 하여 예로써 대우하지 아니하니 혹 욕심을 갖고 장차 음란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닙니까, 라고 했더니 王이 말하기를, 네가 낳은 자식이 아니어서 미워하느냐고 했다. 후비(後妃:다음 부인, 즉 후처)는 王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아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감에서 장차 화가 미칠까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大王께서 엄밀히 살펴보라고 청하였다. 그후 만약 아무 일이 없다면 제가 죄를 엎드려 받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大王은 능히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어 장차 죄를 주려고 했다. 혹 말하기를 好童은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 내가 만약 이런 일을 해명한다면 어머니의 나쁜 점을 들어내게 되고 王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므로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엎드려 칼에 꽂혀 죽었다.

 

  이와같은 얘기를 使臣들이 말하기를, 王은 거짓말하는 것을 믿고 사랑하는 자식을 무참하게 죽게 했으니 어질지 못함은 道가 不足한 탓이라고 자탄했다. 하지만 王子好童도 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옛날 순(舜)임금은 아버지인 고수(瞽瞍)에게 작은 매를 맞고 큰 매는 피하여 달아나 옳지 못한 아버지의 도리를 빠뜨리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好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지 않아도 될 것을 죽었으니 설명하자면 소근(小謹:작게 삼가감)에 고집하고 대의(大義:크게 이로움)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공자(公子:왕의 아들)를 신생(申生:잔나비)과 같은 처사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적고 있다.

 


  겨울 12월이 되자 王子인 해우(解憂)를 太子로 삼았다. 漢나라는 파견사를 보내 조공(朝貢)을 하러왔다. 광무제(光武帝.AD.25~56년)는 다시 王으로 돌아온 것이 광무 8년이었다.

  20년에는 大武神王이 樂浪을 멸망시켰다.

 

  24년 봄 3월에는 경도(京都:지금의 長安城. 즉 西安)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인 7월에는 많은 서리가 내려 곡식이 모두 죽었다. 그리고 8월에는 매화꽃이 만발했다.

 

  27년 가을 9월 漢 광무제(光武帝.AD.25~56년)가 군사를 파견하여 넓은 땅을 건너 樂浪을 정벌하고 낙랑 땅을 취한 뒤 郡과 縣을 두었다. 이곳은 살수(薩水)의 남쪽 漢에 속한 곳이다.

 

 

 

겨울 10월에 大武神王이 돌아갔다. 그리하여 대수촌(大獸村)의 들에 장사지내고 죽은 후의 號를 大武神王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면 後妻의 질투로 인하여 好童王子까지 자결하게 하였으니 自古로 女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2012년 06월 26일 20시 10분   조회:2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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