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논문
高句麗 戰亂史 / 漢나라 百萬大軍의 포위  
律坤

 

 

高句麗 戰亂史 / 漢나라 百萬大軍의 포위  

 

 

 

 

 

 

㉯ 漢나라 百萬大軍의 포위

 


  大武神王 8년 봄 2월이 되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次尙書의 벼슬로서 右相을 뜻함)로 삼아 나라의 軍事 일을 맡겼다. 다음 해 9년 겨울 10월이 되자 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개마국(蓋馬國)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안시켰다. 일부 포로들이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개마국의 땅을 高句麗의 郡과 현(縣:고을)으로 삼았다.

 

  그 해 12월에 구다국왕(句茶國王)은 개마국(蓋馬國)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가 될까봐 두려워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왔다. 이로 말미암아 高句麗의 영토는 점차로 개척되어 광대한 땅으로 넓어져 갔다.

 


  10년 봄 1월이 되자 高句麗 大武神王은 을두지(乙豆智)가 배알하여 절을 올리려 오자 한 급을 올려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11년 가을 7월이었다. 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장병을 이끌고 정벌하러 왔다. 여기서 태수(太守)란 戰國時代 때 郡守의 존칭으로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시키고 全國에 三十六郡을 두게 되었다. 고로 郡을 두게 되어 다스리는 사람을 太守라 했으며 한편 도위(都尉)로서 감사의 권력을 가진 직책이다. 西漢 때 경제(景帝.BC.156~150년) 중원(中元.BC.149~144년) 二年에는 이름을 고쳐 太守라 했다.

 

  왕망(王莽)인 新大王은 요서(遼西)에 있던 대윤(大尹)과 전담(田譚)을 추격하여 죽인 후 다시 엄우(嚴尤)을 쫓아 목을 베어 長安인 西京에서 天下에 알리면서 高句麗라고 이름을 고친 후부터라고 했다. 太守의 직책은 최고 행정장관으로서 郡民의 政事와 司法, 감찰, 軍事, 그리고 財政과 세무를 총괄하는 벼슬이다. 

 

  大武神王은 모든 군신을 모아 회합을 하는 자리에서 전쟁에서 수호하는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때 우보(右輔)를 맡은 송옥구(松屋句)가 말하기를, 臣이 들은 바로는 德을 믿는 자는 흥하고 힘만 믿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중국은 도둑떼가 창궐하고 근검 절약하는 풍속이 황망한 이때에 명분도 없이 병력을 출동한 것은 君臣간에 바르지 못한 책동입니다.

 

 고로 변방에 있는 장수들이 자기의 사리사욕을 노리고 우리 나라를 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道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漢나라 장수들의 공은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험한 곳을 골라 의지하면서 묘책을 강구하면 반드시 漢나라 군사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좌보(左輔)인 을두지(乙豆智)가 하는 말이, 작은 나라가 적에게 강하게 나간다면 큰 나라 적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臣이 생각하건대 大王의 군사와 漢나라 군사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많겠습니까. 漢나라의 百萬大軍을 도저히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불가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좌보(左輔)인 을두지(乙豆智)의 말을 듣던 王이 말하기를, 그럼 어떻게 하면 漢나라 대군을 정벌할 수 있겠는가, 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을두지(乙豆智)가 대답하기를, 지금 漢나라 대군이 먼 곳까지 싸우러 온 것을 보면 날카로운 기세라 지금 대적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大王께서 성문을 굳게 닫고 완고하게 지키고 있으면 기다리던 漢나라 대군은 지쳐버릴 것입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고 출격하면 가히 승리할 것입니다.

 

  王은 이 말을 듣고 위나암(尉那巖) 城에 들어가 수십 일 동안 굳게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漢나라 군사는 포위한 채 풀 기미가 보이지 아니했다.

 

  大武神王은 힘이 빠지고 병사들은 피곤에 지쳐 좌보(左輔)인 을두지(乙豆智)에게, 이제는 도저히 세(勢), 즉 기세가 不利하니 지킬 수가 없다고 말하고, 어찌하면 좋겠는가, 라고 했다.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漢나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의 지대는 암석만 있고 땅이 없어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랜 시간 동안 우리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면서 포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연못 속에 마땅한 잉어를 잡아 수초(水草:물풀)에 싸고 겸하여 약간의 술과 함께 漢나라 군사에게 먹이게 하면 무슨 기미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王은 을두지(乙豆智)의 말에 따라 글을 써 보내기로 하였다. 王은 편지에서 과인이 어리석고 우매해 上國에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장군은 백만(百萬) 大軍을 거느리고 험한 땅 경계에까지 와서 고생하게 하였으니 장군의 후의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박한 물건이나마 좌우 군사들에게 이바지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를 받아본 漢나라 장군은 위나암 성에 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물고기와 술을 보낸 것을 보고 城 안에 물이 있구나 싶어 城을 함락하기 불가할 것을 알고 漢나라 장수가 답을 보내왔다.

 

  漢나라 황제가 나를 용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大王의 죄를 묻고자 여기까지 출전시켰는데 십여 일이 넘도록 정벌할 계략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 지금 보내준 편지 내용을 듣고 보니 말씀이 지극히 공경하고 어진지라 감히 이 사실을 황제게 아뢰지 않으리까, 라고 답한 후 드디어 물러갔다.

 

  2년이 지난 13년 가을 7월이 되었다. 매구곡(買溝谷) 사람인 상수(尙須)가 그의 아우인 위수(尉須)와 더불어 당제(堂弟:집안 동생)인 우도(于刀)와 함께 투항해 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4년 겨울 11월에 뇌성 소리는 들렸지만 눈은 오지 아니했다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면 漢나라 장수가 皇帝의 명을 받아 百萬大軍을 이끌고 高句麗를 정벌하러 왔지만 우보(右輔)인 송옥구(松屋句)와 좌보(左輔)인 을두지(乙豆智)의 지혜로운 장수들로 인해 험하고 험한 바위로 둘러싸인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수십 일 동안 물이 없는 곳이었지만 두 장수의 뛰어난 지략으로 漢나라 百萬大軍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물러나게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다. 어쩌면 百萬大軍 보다 강한 것은 지혜로운 힘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일깨워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2012년 05월 19일 12시 10분   조회:733 )   
  
63 高句麗 戰亂史 /第四章. 高句麗의 內外戰雲 /魏....   律坤 2014/04/11 1,408
62 高句麗 戰亂史 / 九尺長身 故國川王은 善政을 하....   律坤 2014/04/11 624
61 高句麗 戰亂史 / 新大王 伯固는 漢軍을 大敗시키....   律坤 2014/04/11 427
60 高句麗 戰亂史/王亂으로 因해 漢과 扶餘軍에 大....   律坤 2014/04/11 470
59 高句麗 戰亂史/王子好童의 自殺   律坤 2012/06/26 2,358
高句麗 戰亂史 / 漢나라 百萬大軍의 포위   律坤 2012/05/19 733
57 高句麗 戰亂史 / 괴유(怪由)의 활약과 扶餘王의....   律坤 2012/03/18 812
56 高句麗 戰亂史 / 양맥(梁貊)의 征伐과 유리왕의....   律坤 2012/01/18 865
55 高句麗 戰亂史 / 扶餘王의 위협과 王莽과의 漢亂   律坤 2011/12/23 833

1234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