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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 괴유(怪由)의 활약과 扶餘王의 죽음   
律坤

第三章. 高句麗國의 戰亂

 


 


  ㉮ 괴유(怪由)의 활약과 扶餘王의 죽음

 

  유리왕의 큰아들 太子 해명(解明)은 父王의 권유로 자결하고, 둘째 아들인 여진(如津) 王子는 물에 빠져죽었다.

 

  高句麗 3代 王 大武神王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몸은 건장하고 호걸남아로 지략을 겸비한 왕이었다. 父王인 유리왕의 재위(在位) 33년 갑술년(甲戌年)에 太子로 책봉될 때 11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宋氏로 多勿國王이었던 송양(松讓)의 딸이었다.


  大武神王 2년 봄 1월에 경도(京都:지금의 西安을 中心한 玄菟郡)에 지진이 일어나자 大武神王은 대 사면령을 내렸다. 그 당시 백제(百濟) 백성 1천여 호(一千餘戶)가 무슨 일인지 高句麗에 항복해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3년 3월에 東明王의 사당을 세운 후 9월인 가을에 大武神王은 골구천(骨句川)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뜻밖에도 신마(神馬:신의 말)를 얻었는데 이름을 거루(駏䮫)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이 되자 扶餘王 대소(帶素) 즉 금와왕(金蛙王)의 아들이자 朱蒙의 형님이 파견사를 시켜 붉은 까마귀를 보냈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扶餘 사람이 발견하여 잡았다고 해서 까마귀를 바친 王이란 별명이 붙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인데 지금에 와서 변하여 붉게 되었다고 했다. 머리 하나에 몸이 두 개가 붙었으므로, 두 나라가 합할 징조라고 하였다. 扶餘와 高句麗를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扶餘王 帶素는 이 말에 기쁨을 느끼고 고구려왕인 大武神王에게 사신을 시켜 보냈다.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王께서는 군신(羣臣:무리의 신하)과 회의를 하여 扶餘王에게 답해야 한다고 했다. 군신들의 회의에서 하는 말이, 검은 것은 북쪽의 색이므로 지금 변하여 남쪽인 붉은 색이 되었으므로, 붉은 색은 상서로운 길한 물건이라 했다.

 

  大武神王은 扶餘王 帶素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얻었으나 지니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存亡:존재하고 망함)을 알 수 없으니 두고 보아야한다고 했다. 그러자 扶餘王 帶素는 이 소문을 듣고 놀라면서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했다.

 

 

 


고구려 大武神王 4년 겨울 12월이었다. 왕은 扶餘를 치기 위해 출전했다. 비류수(沸流水)의 위쪽 편에 이르러 멀리 물가를 바라보니 어떤 女人이 솥을 마주 들고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女人은 온데 간데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사신을 시켜 밥을 짓게 하였더니 불을 뗄 사이 없이 저절로 불의 열로 인해 밥을 짓게 되었다. 밥솥에서 밥을 지은 관계로 모든 군인들이 배불리 포식하였다.

 

  그때 어디서 홀연히 장부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 솥은 우리 집안의 가보인데 여동생이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제 왕께서 밥솥을 얻었으니 짊어져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밥솥을 짊어진 사람이란 뜻에서 부정씨(負鼎氏)란 성(姓)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후 리물림(利勿林)이라는 숲이 울창한 곳에 이르러 잠을 자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날이 밝은 후 신하를 시켜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금으로 된 옥새와 군사들이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준 물건이구나, 라고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절하며 받았다.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나가는데 키가 구척(九尺:2m70㎝)이나 되는 사람을 만났다. 얼굴을 보니 희고 눈에는 빛이 있었다. 이 사람은 왕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 사람인데 괴유(怪由)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이 들으니 大王께서 북쪽에 있는 扶餘를 정벌하러 간다고 하오니 청하옵건대 신이 扶餘王의 목을 취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王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허락하였다.

 

  또다시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신은 적곡(赤谷) 사람으로 마로(麻盧)라고 하옵니다. 청하옵건대 긴 세모난 창으로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라고 하므로 王은 허락을 하였다.

 

  大武神王 5년 봄 2월이었다. 王은 계속 진군하여 扶餘國의 남쪽에 있는 진흙땅 주위 平地에 진을 쳤다. 군사를 쉬게 하고 말안장도 풀었다. 그러면서도 王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공포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扶餘王은 이때다 싶어 대거 출전했다. 상대 군사가 쉬면서 말안장을 풀고 미처 군대 진영을 갖추지 못한 틈을 이용하여 扶餘王은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진군하다가 진흙땅에 빠져 진퇴양난의 지경에 봉착했다.

 

  이때 왕은 괴유(怪由)를 지휘하여 괴유는 칼을 뽑아들고 고함을 질렀다. 扶餘 군사 수만 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쓰러지고 넘어졌다. 괴유(怪由)는 때를 놓치지 않고 직접 달려가 扶餘王의 목을 잘랐다. 扶餘人들은 王의 목이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꺾이지 아니했다. 오히려 굴복해야할 扶餘 군사들은 겹겹으로 고구려 군진을 포위했다.

 

  大武神王은 병사의 양식이 바닥나 굶주리게 되었다. 王은 근심스럽고 두려움을 참으며 하늘의 신령에게 애걸했다. 그러자 홀연히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에 있는 사람마저 가름할 수 없었다. 안개가 7일 동안 계속되자 王은 짚으로 사람같이 만들어 병기를 잡혀 군 진영 안팎으로 세워 위장하였다.

 

  王이 이 틈을 타 밤에 탈출해 골구천(骨句川)에 와서 보니 신마(神馬)인 거루(駏䮫)와 비류원(沸流源)에서 얻은 큰솥을 잃어버렸다. 리물림(利勿林)에 이르니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 들짐승을 잡아 나누어 먹게 했다.

 

  王이 나라에 돌아온 후 군신들과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외롭고 부덕한 사람이다. 경솔하게 扶餘를 정벌하고자 달려가 扶餘王을 죽였으나 扶餘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군사와 물자를 잃었으니 모두 나의 과실이다. 전쟁에서 죽은 자를 조문하고 다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王의 덕과 옳음에 감동했다. 그리고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3월이 되자 잃어버렸던 神馬인 거루(駏䮫)가 扶餘의 장수와 말 1백 필을 갖추고 학반(鶴盤)의 고개 아래 거회(車廻)라는 골로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여름 4월이 되었다. 扶餘王 帶素의 동생이 갈사수(曷思水) 강변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칭 王이라 했다. 이 사람은 東扶餘王이었던 금와왕(金蛙王)의 막내아들이다. 史書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아니했다. 처음에 큰형인 扶餘王 帶素가 죽은 것을 보고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백여 명의 종사자와 더불어 압록곡(鴨淥谷)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죽인 후 그 백성들을 모아 이곳에 都邑을 정하므로 이 사람을 갈사왕(曷思王)이라 했다.

 

  가을 7월 扶餘王의 사촌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왕(先王:앞에 왕)이 몸과 나라를 망하게 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 또한 王의 동생은 도망을 가서 갈사(曷思)에서 都邑을 정하였다. 나 역시 불초하여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만여 명과 더불어 투항해 왔다.

 

  大武神王은 王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편안히 두게 했다. 扶餘王의 사촌동생의 등에 낙문(絡文:점무늬가 점점으로 얽혀있어 글같이 보이는 현상)이 있어 성을 낙씨(絡氏)라고 하였다고 했다.

  大武神王 5년 10월에 괴유(怪由)가 죽었다. 처음 괴유가 병이 나 위독할 때 王이 친히 문명을 가서 위로하므로 괴유(怪由)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의 미천한 사람으로 누차 깊고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보답할 생각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때 괴유의 착한 말을 들었고 또한 큰 공로가 있었기에 북명(北溟) 산의 양지에 장사지내고 유사(有司:일을 맡아하는 관리)에게 명하여 때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三國史記 本文을 解說하다보면 듣지도 못한 姓과 이름 그리고 地名과 山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記錄을 보면 첫 눈에 大陸임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이와같은 地名이 없다는 것은 高句麗뿐만 아니라 百濟․新羅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歷史敎育을 한국 學者들이 철저히 왜곡하고 조작 날조해 왔음을 볼 수 있다. 특히 本文에서 골구천(骨句川)이니 북명(北溟), 그리고 赤谷이니 하는 地名은 古代부터 있었던 사실이 없다.

 

  따라서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와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그리고 괴유(怪由)․마로(麻盧) 등과 같은 이상한 이름과 羽氏, 부정씨(負鼎氏) 같은 姓氏는 현재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천민 出身들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歷史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학벌이 나라를 위해 必要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까지나 사람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高句麗 本紀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本文에 나오는 北溟, 赤谷이란 地名은 사전에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赤山이란 地名은 호남성(湖南省) 원강현(沅江縣) 東北 五十里 동정호(洞定湖) 변이라고 되어있을 뿐이었다.

 

  扶餘王 帶素는 평소 탐욕이 많아 朱蒙과 유리왕 그리고 大武神王까지 수단과 방법을 통해 高句麗를 멸하기 위한 야심 때문에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던 것이다. 반면 비록 미천한 신분이지만 괴유(怪由)는 扶餘王 帶素의 목을 쳐 공을 이룬 대가로 죽을 때까지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았고, 죽은 후 사신을 시켜 때에 따라 제사까지 나라에서 지내주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2012년 03월 18일 16시 36분   조회: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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