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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 양맥(梁貊)의 征伐과 유리왕의 죽음  
律坤

 

 

 

 

 

高句麗 戰亂史 / 양맥(梁貊)의 征伐과 유리왕의 죽음

 

 

 


  유리왕 32년 겨울 11월이었다. 28년 가을 扶餘王 帶素가 위협하더니 4년 후 32년 겨울에 扶餘人이 드디어 句驪를 침략해 왔다.

 

  王은 아들 무휼(無恤)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라고 명을 내렸다. 무휼은 적은 군사로는 적을 당할 수 없어 특별한 계략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친히 군졸들을 산 곳곳에 매복시켜 扶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기습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扶餘 군사가 드디어 학반(鶴盤)이라는 고개 아래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군졸들을 발동시켜 불시에 공격을 하였다. 그때 扶餘軍士는 大敗하고 말을 버린 채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 왕자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는 병사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33년 봄 1월이 되었다. 王子인 무휼(無恤)을 太子로 삼고 나라의 모든 군사 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扶餘王 帶素와 유리왕은 따지고 보면 친조카이자 친삼촌간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 제일 큰아들인 長男이 바로 대소(帶素)이며, 후처인 河伯女의 딸 柳花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朱蒙으로 되어있다. 고로 배다른 친형제인데도 장남인 帶素가 王權에 도전할까봐 어린 동생 朱蒙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제 朱蒙은 죽고 유리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扶餘王 帶素는 동생을 끝내 없애지 못한 한을 품고 조카마저 죽이려는 심보로 협박과 위협을 하다가 결국 大國의 군사만 믿고 扶餘兵은 침공하려했으나 무휼의 지략에 大敗하고 말았던 것이다.

 


  흔히들 强者弱食이라고도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정복하고 지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강한 자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우수하고 많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니다. 진실로 강한 것은 아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넓고 깊어 지혜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무휼 王子가 비록 적은 군졸로도 능히 扶餘의 大軍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한 것이다.

 


  33년 가을 8월이 되었다. 유리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 명으로 서역 쪽에 있는 양맥국(梁貊國)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오이와 마리는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양맥국을 멸망시킨 다음 빼앗아 漢나라 땅인 양맥국을 파하고 高句麗 현(縣:고을)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이곳의 현은 본래 현도군(玄菟郡)에 속한 곳이라고 되어있다.

 


  37년 여름 4월이었다. 王子인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 王은 비통하고 애통하였다. 사신을 시켜 시신을 찾으려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일 비류(沸流)에 사는 제수(祭須)란 사람이 찾았다는 소문을 듣고 왕골령(王骨嶺)에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물에 빠진 王子 여진을 찾은 제수(祭須)에게 금 열 근과 전답 십경(十頃)을 하사하였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밭 십경(十頃)이란 백무(百畝)를 뜻한다. 백무는 여섯 척(六尺) 즉 180㎝의 백 배 되는 거리의 밭을 뜻한다. 다시말해 180㎝ 되는 밭이 四方으로 되어있으니까 지금으로 보면 약 2천 평 정도의 밭이라고 할 수 있다.

 

  37년 가을 7월이었다. 유리왕은 두곡(豆谷)에 행차했다. 겨울 10월 왕은 두곡(豆谷)의 별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곡의 들에 장사지내고 돌아가신 후의 호(號)를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유리왕의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아버지였던 朱蒙도 아버지인 금와왕(金蛙王)을 떠나 멀리 남으로 달려와 혼자 구려국(句驪國)을 세우게 되었다. 朱蒙이 도망올 때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의 세 친구와 함께 내려왔으나, 유리왕이 질산(質山)의 산곡에서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므로 朱蒙의 친구인 협부(陜父)의 충언(忠言:충성스러운 말)을 묵살하고 노하여 협부의 직을 박탈하고 말직 사관(司官:관에서 일함)으로 하라고 명하자, 협부는 남한(南韓:남쪽에 있는 한국. 지금의 남한이 아님)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朱蒙의 친구인 세 사람 중 오이(烏伊)와 마리(摩離) 두 친구는 끝까지 유리왕을 도와 양맥국(梁貊國)을 멸하고 高句麗 현(縣)을 두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유리왕 역시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인 朱蒙이 남쪽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칼을 찾아 옥지(屋智)와 구추(句鄒) 그리고 도조(都祖)의 세 친구와 함께 남쪽으로 朱蒙을 찾아 卒本에 오게 된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막힌 일이다. 朱蒙 역시 친구 셋과 남으로 내려왔고, 아들 유리왕 역시 친구 세 사람과 함께 내려온 것은 필연적인 인과(因果)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유리왕은 도읍지를 옮길 때 왕자인 해명(解明)이 옛 都邑地에 남아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黃龍國王이 준 강한 활을 부러뜨렸다는 빌미로 왕자인 해명(解明)을 太子로 세우고도 자결하게 한 것은 父王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유리왕은 이렇게 매정한 性情 탓으로 王子인 여진(如津)마저 물에 빠져죽는 아픔을 겪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과오로 인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사람이라면 한번쯤 되새겨야 할 대목이라 생각된다. 또한 압박하는 扶餘王 帶素의 군사가 大敗하듯이 말이다.

 

  서역(西域) 쪽에 있는 양맥국(梁貊國)을 멸망시키고 高句麗 현을 두게 했지만, 유리왕의 극단적이고 격한 감정으로 인해 두 王子를 먼저 보낸 아픔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유리왕은 많지 않은 나이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 아니할 수 없다.

 


  


 

 

 

( 2012년 01월 18일 20시 54분   조회: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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