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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 扶餘王의 위협과 王莽과의 漢亂  
律坤

 

 

 

高句麗 戰亂史 / 扶餘王의 위협과 王莽과의 漢亂

 


  유리왕 末期에는 漢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東扶餘, 北扶餘도 사양길에 있던 時期였다.

 

  유리왕 28년 8월이었다. 扶餘王 대소(帶素)는 使臣을 보내 유리왕을 꾸짖어 말하였다. 우리 선왕(先王:앞에 王은 해부루왕과 금와왕)과 東明王과는 대단히 좋은 사이였다. 그런데 우리 臣下를 유인하여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욕심을 갖고 일부 백성과 성(城)을 취하고 모아 나라를 이루게 하였다. 무릇 나라에는 크고 작은 것도 있고 사람과 어른과 아이가 있어 적은 일과 큰 것 사이에는 예의가 있는 법이다.

 

  다시말해 어른과 아이가 있듯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예로 대하는 것은 순리이다. 금일에 와서 왕이 예의와 순리를 지킨다면 하늘은 반드시 도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하고 끝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연이나 사욕을 갖고 보존하고자 한다면 사직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고 했다.

 

  그때 유리왕이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고 백성과 병사도 약합니다. 세력을 강하게 하기까지는 치욕을 참으면서 굴복할 것이다. 그렇게 된 후에야 효력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무리의 臣下들과 엄밀히 의논하여 답하기로 하였다.

 

  유리왕은 扶餘의 使臣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인은 넓은 대륙의 한구석에 떨어져 있어 예의를 듣지 못했다. 지금 大王의 가르침을 받으니 감히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이때 王子인 무휼(無恤)은 王이 扶餘에 답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使臣을 보고 말하였다. 우리 선조는 신령스러운 자손이며 어질고 재주가 많았다. 그런데 大王이 시기하여 父王을 욕보이고 죽이기 위해 말을 먹이는 일을 시키므로 不安해서 나온 것이다. 大王은 예전에 있었던 허물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군사를 가진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경멸하니 使臣은 돌아가서 大王에게 고하시오, 라고 했다. 지금 누란(累卵)이 있으니 만약 大王이 알을 훼손하지 않으면 臣은 장차 大王을 섬길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오, 라고 했다.

 

  扶餘王은 使臣의 말을 듣고 여러 臣下들에게 두루 물은 즉 한 늙은이가 말하기를, 누란(累卵)은 위험한 것이며 그 알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안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또한 왕이 알지 못하면 위태로울 것이며 눈앞에 욕심을 가지고 나온다면 쉽게 위태로움만 같지 아니하므로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도리를 알아야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29년 여름 6월이었다. 모천(矛川) 江 위에 검은 개구리가 있었다. 더불어 붉은 개구리와 함께 무리 지어 싸웠다. 그런데 검은 개구리는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은 개구리는 북쪽의 색이므로 북부여(北扶餘)가 멸망할 징조라는 것이었다.

 

  29년 가을 7월에는 두곡(豆谷)과 떨어진 곳에 宮을 지었다고 했다.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유리왕 28년에서 31년 사이에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문장이다.


  31년 漢나라 때 왕망(王莽)은 군사를 일으켜 호(胡:큰 나라)를 정벌하고자 한 것은 한 개인의 욕심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변방에 침입하여 범법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무리를 모두 소탕하기 위해 왕망은 강한 군사를 파견하여 압박하였다. 특히 요서(遼西)에 있는 대윤(大尹)과 전담(田譚)을 추격하여 죽였다. 그리하여 고을과 군(郡)은 우리측으로 허물없이 되돌아왔다.

 

  엄우(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들은 범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고을과 郡에 영을 내려 마땅히 위안을 해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두려울 정도로 큰 죄를 짓고 있으며 공포 서러울 만큼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을 다그친다면 扶餘에게 반드시 붙어 화합을 할 것이다. 흉노(匈奴)를 이기지 못한 상태에서 만약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왕망(王莽)은 듣지 아니하고 엄우(嚴尤)에게 조서를 내려 치도록 하였다. 엄우는 우리의 장수(將帥)를 유인하여 연비(延丕)를 참하여 목을 가지고 경사(京師:지금의 西安)에 전해왔다.

 

  이러한 記錄은 漢書와 後漢書, 三國史記는 勿論 南史 그리고 北史에 두루 적혀 있는데 구려(句驪)의 제후가 유인하여 추(騶)를 참하였다고 적고 있다.

 

  엄우(嚴尤)가 연비(延丕)의 목을 베어 경사(京師)에 전해온 것을 보고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고 이름을 고쳐, 나는 王이며 구려(句驪)를 아래 제후(諸侯:天子國 아래 있는 제후국임)로 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망(王莽)은 天下에 포고하여 모두 이와같은 사실을 알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漢나라의 변방에서 살아가던 도둑들은 나아지지 않고 침략하는 일이 더욱 심하였다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강한 나라라고 하여 작은 나라를 깔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요즘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것과 같으며, 약자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무력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왕망(王莽)이다. 본래 왕망은 구려(句驪)인 高句麗 王子이다. 그런데도 왕망을 대륙인 중국의 漢나라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왕망(王莽)은 엄연히 高句麗 6代인 태조왕(太祖王)의 막내 동생이라고 三國史記에 記錄되어 있다.

 

  後漢書 句驪 편에 보면 大尹과 전담(田譚)을 죽이고 장군인 연비(延丕)의 목을 베어 西京인 지금의 西安에 전했을 때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경명고구려(更名高句麗)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이름을 다시 고구려라 하고 天下에 공포한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王莽 때부터 正式으로 高句麗란 나라 이름으로 고친 것으로 보아야한다. 왕망은 전술한바와 같이 고구려 6대 태조 대왕의 막내 동생으로 돌아가신 후의 휘호(諱號)가 백고(伯固)로 三國史記에 記錄되어 있다.

 

  고구려는 사실상 朱蒙 때부터 구려(句驪)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해 왔지만 왕망(王莽)이 漢나라를 격파한 후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고 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왕망을 중국 되놈 취급하여 날조되고 조작된 植民史觀을 敎育해 온 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사실 왕망(王莽)은 高句麗라고 나라 이름을 고친 후 고구려 8대 신대왕(新大王)으로 등극했음을 三國史記에는 똑똑히 적혀 있는 것이다.

 

 


 

( 2011년 12월 23일 18시 54분   조회: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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