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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驪 뿌리歷史 11  
律坤

 

 

 

高句驪 뿌리歷史 11  

 


 


③ 平壤城과 長安城

 


  平壤城은 高句麗 都邑地임을 누구도 否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平壤城이 北韓에 있는 平壤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착각에 不可하다. 이 기회에 平壤城에 대해 考證을 확실히 하는 것이 高句麗史를 理解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럼 三國遺事 古朝鮮편의 本文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有壇君, 王儉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 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咒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 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 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古朝鮮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이다. 즉 왕검(王儉)은 요단군(堯壇君)인 요임금을 말한다. 魏書에 의하면 이내 2千年 동안 壇君은 이어 내려왔다. 王儉은 都邑을 세울 때 아사달(阿斯達)이며 나라를 열 때 나라이름을 朝鮮이라 했다. 그리고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2475년)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2405년) 등 高氏와 더불어 같은 때이다.

 

  옛 記錄에 의하면 上古代 환국(桓國) 즉 환인씨(桓因氏.B.C.8937년)의 나라가 있었다. 설명하자면 제석(帝釋)이다. 여기서 帝釋이란 桓因氏를 말한다. 다시말해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는 9번의 得道를 통한 神人임을 의미한다. 서자 桓雄은 天下에 여러 뜻을 갖고 탐욕이 가득한 人間世上을 다스릴 것을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있었다. 本文에서 서자환웅(庶子桓雄)이라 하였는데 桓因氏에게는 실제 庶子가 正史에는 없다. 다만 壇君朝鮮 第一期가 지나고 第二期인 유소환웅씨(有巢桓雄氏.BC.3898년) 시대(時代)를 서자(庶子)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의 아들 이름을 적고 庶子가 있었는지를 보기로 한다. 반고환인씨와 상원부인(上元夫人)인 막지(莫知) 사이에 12명의 아들이 있었다. 歷代神仙通鑑과 幼學須知 그리고 史要聚選에 있는 記錄을 통해 12名의 아들 이름을 적어보기로 한다.

 

 

  ①알방(閼逄) ②전몽(旃蒙) ③유조(柔兆) ④강어(疆圉) ⑤저옹(著雍) ⑥도유(屠維) ⑦상장(上章) ⑧중광(重光) ⑨현묵(玄黙) ⑩소양(昭陽) ⑪엄무(閹茂) ⑫대연(大淵)으로 되어있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자(庶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서자(庶子)환웅(桓雄)이라고 한 것은 一然스님이 간략하게 文章을 記錄한 것으로 보인다.

 


  삼위태백(三危太伯)에서 아래 世上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三危太伯은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에 있는 험준한 山이다. 환인씨와 아들들이 三危太伯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世上 사람들을 크게 이롭게 해야겠다고 다짐한 글이다. 이내 천부인(天符印) 즉 하늘의 眞理와 人間의 眞理 그리고 땅인 自然의 眞理가 수록된 天 . 人 . 地가 새겨진 眞理의 글 3개를 받았다. 그리하여 큰 뜻을 품고 파견되어 갈 때 道通者와 무리 3千名을 거느리고 太伯山 아래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太伯山은 지금에 와서 묘향산(妙香山)이라고도 한다.

 

  太伯山으로 내려와 神의 제단이 있는 나무 아래에 신시(神市)를 定했다. 神의 都市를 설명하자면 道를 5번 이상 통한 사람이 세운 도시라는 뜻이다. 이 분을 설명한다면 환웅천황(桓雄天皇)이다. 그때 장수로는 풍백(風伯)은 立法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석제라(釋提羅)이며, 운사(雲師)는 司法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육약비(陸若飛)이며, 우사(雨師)는 行政官으로서 왕금영(王錦營)이다.

 

  神市를 세울 때 正統國으로 出發하면서 주로 곡식을 가꾸고 조리하는 법과 건강과 수명에 대한 것, 그리고 병(病)과 형벌에 관계되는 것, 또한 善과 惡에 대한 것을 人間들에게 무려 366 가지 일들을 통해 理化世界를 창건하고자 했다.

 

  그 당시 곰 한 마리는 熊族의 처녀와 호랑이 한 마리는 虎族의 남자가 같은 굴에 살면서 언제나 신웅(神雄) 즉 得道를 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따라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道를 通해 참사람이 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 당시 神 즉 道를 5번 이상 통한 사람을 神人이라 했다. 그때 神이 되기 위해 영험한 쑥 1주와 마늘 20매를 나누어 먹었다. 그리하여 1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했다. 다시말해 편리하게 사람의 형상이 되기를 기원했다. 편리하게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人間에서 지혜있는 聖人이 되기를 원한 대목이다.

 

  곰족의 처녀와 호랑이 부족의 총각은 쑥과 마을을 나누어 먹은후 21일 동안 금기하였다. 마침내 웅족의 처녀는 女子의 몸이 되었으나 호족의 총각은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즉 黃帝 部族의 처녀는 깨달음을 얻었으나 神農氏 部族의 총각은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곰 부족의 처녀는 남자가 없는 결혼을 하려 하였다. 매일같이 제단이 있는 나무 밑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곰 부족의 처녀는 임시로 혼인한 후 아이를 잉태하고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임시로 결혼을 했다는 것은 앞으로 天子가 될 수 있는 친족과 혼인을 했다는 뜻이다. 즉 근친상간을 말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고 호를 단군왕검이라 했으며 당고(唐高) 즉 아버지 고신씨(高辛氏.BC.2476년)로부터 이어 받았으므로 堯임금을 堯唐高라고 한다. 또한 堯임금을 도당씨(陶唐氏) 혹은 당요씨(唐堯氏)라고 한다. 唐高氏가 즉위한 50年은 庚寅年이라 했으며 즉위한 元年이 戊辰年이라 했다. 그러나 一然 스님은 干支年代를 잘 모르기 때문에 착오가 생긴 것이다.

 

  BC.2357년 甲辰에 都邑을 한후 25년 후 다시 都邑地를 阿斯達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25년 후 阿斯達로 옮길 때가 BC.2333년 戊辰에 해당한다. 고로 本文에 庚寅年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一然스님이 庚寅卽位와 則五十年 丁巳 등은 잘못 안 것이다. 특히 庚寅年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확실하지 않아 의심스럽다고 했다.

 

  堯王儉의 都邑地는 平壤城이라고 했는데 平壤은 今西京이라고 되어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朝鮮이라고 칭한 것이다. 또는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이 있는 아사달(阿斯達)로 옮겼으며 이름을 궁홀산(弓忽山) 그리고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했으며 지금에 와서 궁미달(弓彌達)이라 했다. 나라를 거느린 지 1천5백 년이 되었다.

 

  周나라 호왕(虎王.BC.1122년) 즉 武王이 즉위할 때 己卯年이며 그 당시 箕子朝鮮이 봉해졌다. 壇君은 이내 唐京으로 옮겨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 唐京이란 堯王儉이었던 唐堯氏가 王儉城인 서울로 옮긴 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사달(阿斯達)의 山神이 되었으며 수명은 1,908세라고 했다.

 

  唐나라 배구(裵矩) 전에 의하면 高句麗는 본래 대나무와 같이 곧고 외로운 나라라는 뜻이다. 周나라 때 箕子朝鮮이 봉해진 후 漢나라가 나누어져 둔 곳이 3군(三郡)인데 설명하자면 玄菟 . 樂浪 . 帶方과 北帶方이다.

 

  通典에서도 역시 같은 설이며 漢書에는 眞番 . 臨屯 . 樂浪 . 玄菟의 四郡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三郡이라 했다. 하지만 이름만은 또다시 같지 않으니 어찌해 그런지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平壤城에 대한 史書에는 魏書 . 周書 . 隋書 . 唐書 . 舊唐書 . 三國史記 등 記錄이 많다. 하지만 한결같이 北韓에 있는 平壤인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事實은 北韓에는 平壤城이 없고 高麗末 충숙왕(忠肅王.AD.1332년) 때 한반도로 옮겨진 地名이다.

 

  三國史記 高句麗 제 10代 山上王 13年 10月에는 都邑을 丸都城으로 옮긴다. 그후 11代 東川王 21年 丸都城에서 경난(經亂) 즉 學者들의 난동으로 都邑地로서 不可하므로 平壤城을 쌓고 모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기게 된다. 여기서 平壤城은 본래 仙人이 살던 곳으로 王儉이 살던 집이며 혹은 堯임금이 都邑해 있던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적고 있다.

 

  16代 故國原王 4年 8月에 平壤城을 증축했다고 했다. 그후 12年 봄 2月에는 丸都城을 수리하고 다시 國內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8月에 丸都城으로 다시 옮겨갔다. 또한 13年 7月에는 平壤城과 東黃城으로 또다시 옮겼다. 東黃城이 잇는 곳은 지금의 西京인 西安이며 목멱산중(木覓山中)이라고 記錄하고 있다.

 

  19代 廣開土大王 15年에는 都邑을 平壤城으로 옮겼다. 24代 陽原王 8年에 長安城을 쌓고 25代 平原王 때 都邑地를 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215쪽에는 平陽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平陽縣은 본래 平壤이며 옛부터 堯王儉이 都邑한 곳으로 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남쪽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平陽府는 古帝堯 즉 옛 堯임금의 都邑地로서 山西省 臨汾縣 西南이라 했다. 또한 옛 城은 山東省 추현(鄒縣)에서 다스렸다는 說과 湖北省 운서현(鄖西縣) 서북이라 했다. 그러나 山東省과 湖北省이라고 하는 것은 歷史를 故意로 歪曲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河南省 임장현(臨漳縣) 서쪽이라는 주장도 있는가 하면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 西南이라는 說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는 歷史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平壤을 平陽이라는 글자로 고쳐 地名을 이리저리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하간 平壤城은 본래 西京인 西安에 있다는 것을 모든 正史에서는 밝히고 있다. 堯壇君 王儉이 25년 후 阿斯達로 다시 옮긴 곳은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남쪽이거나 西南에 해당한다는 것은 많은 史書에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平壤城은 본래 西京인 西安으로서 堯王儉이 都邑한 왕험성(王險城)은 王儉城이며 王儉城은 후일 高句麗가 都邑하면서 平壤城이라 했다. 그후 高句麗 24代 陽原王 8年에 長安城을 쌓았다고 했으며 25代 平原王 28年에 都邑을 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三國史記에는 記錄하고 있다.

 

  唐書와 舊唐書 . 隋書에는 平壤城이 長安城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로 平壤城과 長安城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으며 堯壇君王儉이 都邑했던 城에 堯임금의 後裔인 高句麗가 平壤城의 이름을 고치면서 長安城이 되었던 것이다.

 

 

 

 


( 2009년 03월 28일 20시 45분   조회:1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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