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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蚩尤)에 대한 고찰(考察) 2  
律坤

 

  第二章 蚩尤와 生涯

 

  ㉮ 野 望

 

  황제(黃帝)가 12살 때 천자(天子)에 등극하는 것을 본 치우는 분노했다. 그리하여 아홉 부족의 무리와 81명의 형제들과 함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지방으로 이주했다.

 

  치우는 그곳에서 그때부터 천자(天子)의 행세를 하면서 갖은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했다고, 사기(史記)와 태산신문화(泰山神文化)의 기록에 엿보인다.

각 지방의 예쁜 처녀들을 잡아와 지방 제후들에게 후처로 삼게 했다. 지방 제후들에게 명을 내려 강제로 곡물을 징수했으며, 장정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군인으로 만들었다. 활과 창을 만들었고, 병기를 만들기 위해 온갖 수탈을 자행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第三十八卷 한기(漢紀) 三十, 왕망(王莽) 下篇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황제(黃帝)가 천하(天下)에 있는 장병(將兵)을 정할 때, 상장군(上將軍) 내에 대장(大將)을 두고 그밖에 대사마(大司馬) 5인이 있었는데, 大將軍과 士兵의 관리가 무려 7십3만8천9백 명(七十三萬八千九百名)이었다. 士兵들은 1천3백5십만 명(千三百五十萬名)이었다고 적고 있다.

 

  치우(蚩尤)의 군사(軍事)는 얼마나 되었는지, 기록에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추측하건대 적어도 1천만 명(千萬名) 이상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蚩尤가 42살에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지방으로 이주해간 때부터 8년 동안 무기와 병력을 강제로 모아 꾸준히 군력(軍力)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황제(黃帝)는 12살에 천자(天子)에 등극한 후에도 곤륜산(崑崙山)에 사당을 두 곳에 마련하고 꾸준히 도학(道學)을 연마했다. 그러나 치우는 밤낮으로 군비(軍備)를 비축하고 제후들을 독촉하여 병력을 확충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군사(軍事)에 힘을 쏟았다.

 

  황제는 전령을 수차례 보내어 군비를 확장하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치우는 천하통일을 하여 여민(黎民)들을 잘 살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야망을 품고, 황제를 타도하기 위해 풍백(風伯)운사(雲師)우사(雨師)의 삼사(三司)를 두고,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산서성(山西省) 중부(中部) 이상과 요령성(遼寧省) 지방 등에서 장정(壯丁)과 군비(軍備)를 강제로 확충해 나갔다.

치우는 52세 때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황제가 군비확장을 하기 전에 결말을 내려는 심산이었다.

 

  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사회가 안정되어갔고, 황제가 다스리는 지역은 곡창지대로 유명한 산동성(山東省) 일대와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 귀주성(貴州省), 호북(湖北)과 호남성(湖南省) 등으로, 황제가 만일 군비를 확충할 경우 치우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산해경(山海經) 속에 있는 대황동경(大荒東經)과 대황북경(大荒北經), 그리고 노사(路史)의 치우전(蚩尤傳),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지림(志林) 등에 나타나 있다.

 

  치우(蚩尤)는 81명의 형제들과 합심했다.

  이 당시에는 산아제한이 없었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보면, 한 집안의 식구가 3백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치우가 살던 때만 해도 내혼제(內婚制)와 외혼제(外婚制)가 병행되던 시대였으므로, 인구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인 60여 년 전만 해도 한 식구가 최하 5명에서 많게는 10여 명이 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이 마치 자랑인 것처럼 되던 사회풍조였다.

 

  황제 때만 해도 정부인이 4명이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과의 말할 수 없는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은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황제(黃帝) 소생의 자녀는 25명이었으나, 그중 14명만이 아버지의 성(姓)을 물려받았다고 사기(史記)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치우와 황제 때 1천만 명 이상의 군병(軍兵)을 확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폭발적인 인구증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고대(上古代)인 환인천제(桓因天帝. B.C.8937년) 때부터 치우와 황제 때인 기원전 2679년 전까지는 비록 부족(部族) 간의 다툼은 있었다하더라도 엄청난 군비를 증강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도학(道學)을 업(業)으로 삼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 잘 나타나 있다.

 

  치우(蚩尤)가 군비(軍備)를 끊임없이 증강하는 것을 안 황제(黃帝)는, 더 이상 치우(蚩尤)에게 바랄 것이 없음을 깨달았고, 무엇을 해야할지 직감하고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로 돌아와 준비에 임하기 시작했다.

 

 

  ㉯ 蚩尤와 黃帝戰

 

  이때가 치우(蚩尤)의 나이 52세였고, 황제(黃帝)는 20여세였다.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의 기록에 의하면,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직계 자손은 계곤씨(啓昆氏.B.C.2979년)이다. 계곤씨의 직계 혈손(血孫)이 치우(蚩尤)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염제신농씨에서 계곤씨로 이어진 후 190년 후 소전씨(少典氏B.C.2789년)로 이어지고, 소전씨의 아들이 황제(黃帝)이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의 아버지가 계곤씨(啓昆氏)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계곤씨와 치우의 연대에는 무려 272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아들이 아니라 직계 자손임이 분명하다.

 

  사서(史書)는 경우에 따라 간략 간략하게 뿌리만을 기록하는 경우가 있어, 잘못하면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다. 그 예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권(紀異卷)편과 고조선(古朝鮮)편이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왕운기(帝王韻紀)라든가 사기(史記)의 경우도 그러하며, 죽서기년(竹書紀年)과 태평어람(太平御覽), 그리고 책부원구(冊府元龜) 역시 그러하다.

 

  치우는 약 10여 년간 군비를 증강했고, 52세가 되던 해 드디어 전쟁의 깃발을 들었다. 치우의 군병은 파죽지세였고, 황제의 군사는 연전연패했다.

태산신문화(泰山神文化)에 있는 기록 일부를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黃帝與蚩尤的戰爭, 說明兩大原始集群之同會發生規模宏大的爭奪與較量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설명하자면, 원시사회에서 양대(兩大) 집단세력들 사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쟁탈전으로, 수적으로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치우(蚩尤)의 진영에서는 81명의 형제들이 모두 장수가 되어 진두지휘했으며, 치우 자신은 머리에는 동(銅)으로 된 투구, 얼굴에는 철로 만든 것을 쓰고 전쟁에 임했다. 그리고 긴 창과 칼, 큰활을 가진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닌 군병이 있었다.

 

  치우의 군병(軍兵)들은 완전무장을 한 살인무도(殺人無道)의 기세가 당당하였다고, 태산신문화(泰山神文化)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기에 치우는 불굴의 전쟁신(戰爭神)이라고까지 불렸던 것이다.

 

  한편 황제의 진영은 아직 전쟁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연전연패하는 와중에, 지구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태산(泰山)으로 돌아가 현녀(玄女)로부터 전법을 전수 받았으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산해경(山海經)에는 기록되어있다. 살상을 목적으로 천하를 위력으로 잡겠다는 치우의 욕망과는 달리, 황제가 인(仁)과 의(義)를 중시했기 때문에, 천신(天神)이 현녀(玄女)를 보냈던 것으로 사기(史記) 제왕본기(帝王本紀) 태사공(太史公)편에서는 적고 있다.

 

  황제와 치우간의 전쟁은 10여 년간 계속되었으며, 73번의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황제가 처음에는 전쟁에서 연전연패 하였지만, 도덕과 인(仁), 그리고 의(義)를 중시했으므로 차차 전쟁에서 유리(有利)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장기전을 강구한 것도 성과였다. 황제에게는 군비의 보급과 병력을 증강할 수 있는 넓은 강역과 옥토(沃土)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치우는 패권적 호전성 때문에 군사와 군비의 조달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무리가 따르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73번 이상의 전투에서 인명의 살상은 수백만이 넘었다. 죽은 자의 시체가 산같이 쌓여, 흐르는 피가 고여 소금산이 되었다고 했다.

 

 

  ㉰ 蚩尤의 죽음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보면, 치우의 깃발은 코끼리를 상징하였다고 한다. 전쟁을 할 때 코끼리의 깃발을 앞세웠다고 되어있다.

 

  치우(蚩尤)와 황제(黃帝)는 산동성 태산(泰山)을 무대로 큰 전쟁을 9번이나 하였다는 기록이 황제현녀전법(黃帝玄女戰法)에 있다고, 태산신문화(泰山神文化)에서는 적고 있다.

 

  처음에는 황제의 병력이 손실을 입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치우의 군사가 약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치우의 활동무대는 하북성(河北省) 지방이었으므로 산동성에서의 군비와 병사, 군량미 조달이 용이하지 아니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산동성 태산에서는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반면 황제의 도읍지는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이며, 곡부의 바로 북쪽이 태산(泰山)이었다.

 

  치우는 하북(河北) 지방으로 후퇴했다.

  황제는 이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지칠 때로 지쳐있었다. 그러기에 하루라도 천하를 안정시켜야겠다는 것이 황제의 의도였다.

  치우의 병사들이 하북성 지방으로 후퇴하는 것을 따라 황제는 北으로 北으로 진군했다. 가는 곳마다 싸움터였다. 치우의 병력과 황제의 군사가 마주칠 때마다 전쟁은 일어났다.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황제의 병사들은 호남성(湖南省)과 사천성(四川省) 등지에서 대나무를 이용한 화약병기를 만들어 치우의 군사를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북성 탁록(涿鹿) 일대에서 치열한 전쟁이 연일 계속되었다.

 

  산해경(山海經)내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따르면, 황제(黃帝)의 명을 받은 여발(女魃)이 응용(應龍)과 함께 치우를 공격하였다고 했다. 기주(冀州)의 들에서 응용이 물을 이용해 공격하자, 치우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시켜 큰바람으로 비를 오게 했다. 이에 황제는 천녀(天女)였던 여발에게 비를 그치게 하고, 응용을 시켜 치우를 살해했고, 마침내 10여 년간의 대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치우의 나이는 62세였고, 황제는 30여세였다고 정사(正史)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치우가 109년간이나 在位했으며, 수명은 151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치우가 죽은 후 여민(黎民)들은 치우의 죽음을 믿지 아니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황제는 치우의 화상을 그려 천하에 붙이도록 했다. 천하가 평안해졌음을 알려 백성들의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후일 누군가에 의해 치우는 자오지 단군(慈烏支壇君)으로 109년간 재위했고 151살까지 살았다고 기록한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고증본이 하나 없다.

  고증본이 하나 없는 한단고기의 기록만 믿고, 치우는 단군으로 황제는 중국인으로 몰아세운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는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도읍한 신라의 시조이다. 그리고 황제의 손자인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B.C.2482년)는 고구려의 시조라고, 삼국사기와 여러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약 치우만 단군으로 보고 황제를 중국인으로 본다면, 신라와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중국인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사서(史書)의 기록은 한쪽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 많은 정사(正史)를 규합하고 고증하여 결론을 얻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여하간 치우의 죽음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자기행위의 과정이 운명이라고 했다. 천하를 쥐어 여민(黎民)들을 구하겠다는 의지는 좋았다하더라도 방법이 좋지 아니했다. 탐욕과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은 치우 자신의 죽음의 길이었던 것이다.

 

  (치우의 무덤은 泰山 아래인 산동성 東平縣 壽長 지방에 있다. 매년 10월이면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泰山神文化 참고)

 

 

  山海經內의 치우에 관한 기록 (자료실/학회자료)

 

 

 

( 2008년 02월 25일 15시 51분   조회:2325  추천: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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